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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Aug 08. 2022

그건 내 열매가 아니었어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달은 진실


"너 나랑 동갑 맞아? 넌 어떻게 된 애가 점점 더 멋있어 지냐?"

"나 백화점 매장 들렀다가 오느라고 신경 좀 쓴 거야. 하하. 매장 샾 마스터들한테 나이 먹어서 감 떨어졌다 소리 안 들으려면 이 정도 노력은 해줘야 해. 그리고 위아래로 이것저것 눈치 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지난 주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패션 잡지 화보 속에서 나온 듯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푸념을 늘어놓지만, 나름 신경 써서 입은 내 옷차림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친구의 모습이 멋지게만 보였다.

친구는 현재 25년이 넘는 경력에 직책이 이사님 이시다. 연봉도 많이 받고, 회사에서 내준 차를 타고 다닌다. 내가 가장 오래 일했던 회사의 디자인실에서 몇 년간 함께 근무하며 거의 매일 붙어 다니던 짝꿍이었다.


"요새 매출은 좀 어때?"

"별로야. 그래도 작년보다는 상승세라 잘리지는 않을 것 같아. 하하."

씁쓸해 보이는 웃음.

"넌 어때? 사회복지사 공부하는 거 자격증 땄어?"

"곧 자격증 나올 거야."

"나도 그거 공부할까?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데 집에서 시어머니랑 있을 수는 없잖아."

친구는 아이들을 시어머니 손에 맡겼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음에도 퇴근하고 집에 가서 편히 쉬기가 힘들다고 한다. 아들보다 잘 나가는 며느리가 그리 곱지만은 않으신가 보다.

"넌 니 브랜드 하나 차려야지. 아깝게 그걸 그냥 버리게?"

"요즘 경기도 별로 안 좋고, 경쟁이 좀 치열해야지. 이 바닥 지겹기도 하고. 우리 맨날 패턴실 가서 싸우고 원단업체 가서 싸우고 완전 쌈닭이었잖아. 그래야 버틸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직접 싸울 일은 없지만 매일 그런 모습들 보기도 피곤하고 나도 좀 맘 편한 일 해보고 싶어."

말은 그렇게 해도 친구는 천상 디자이너 체질이다.


"애들은 잘 지내지?"

"내가 명절이나 연휴 때마다 출장 다니고,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어도 다 어머니가 갔었잖아. 최근에 코로나 때문에 출장 안 가니까 같이 시간 보내면서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자꾸 싸우게 돼. 그래서 얼마 전부터 강아지 한 마리 키우잖아. 강아지만 날 반겨줘. 하하."

이번에도 씁쓸한 웃음.

"네 아이들 너 학교에 못 오는 게 출장 때문이었다는 거 알고 있었을 거고 우리 엄마 멋지다고 친구들한테 엄청 자랑했을 거야. 우리 애들은 내가 과거에 디자이너였다는 것만으로도 와~하는데.  가끔 그때 일 그만둔 거 후회돼. 고생만 하고 그만둔 것 같아서."

"난 네가 부럽다. 넌 애들 크는 거 다 봤잖아. 난 어느 날 보니까 애들이 다 커버려서 아쉬운 게 많아. 그리고 경력이 오래될수록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느낌인데, 알아서 나가줘야 하나 싶다가도 지금 그만 두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 같아서 버티는 거야."


나는 그간 디자인실에서 8년을 일하고 그만둔 것에 관해 열심히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는데 열매를 따먹지 못한 것 같다고 아쉬워했었다. 하지만 거의 30여 년을 일한 친구 역시 열매를 따 먹지는 못한 것 같아 보였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땅에 씨를 뿌리지 않았다. 열심히 물을 주고 키워서 아무리 탐스러운 열매가 열린다 해도 그 열매는 우리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먹을 수 없는 열매였다.

'우리는 단지 열매를 조금 사 먹을 수 있는 돈을 번 것뿐이었어...'

'그래도 친구는 좋은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알아냈을 테니 언젠가 자신의 땅에 씨를 뿌릴 수도 있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나는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있다.

열심히 뿌리고 있다.

열심히 물도 줄 것이다.

하지만 열매가 얼마나 열릴지 알 수가 없다.

운이 좋지 않으면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씨 뿌리는 작업은 언제나 행복하다.

그 행복에 젖어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지금 이 땅은 내 땅이 확실한가?'

.

.

.

'일단 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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