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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Nov 28. 2023

동물원에서 다이어트를 하게 될 줄이야

춥고 배고팠던 서울동물원에서의 하루


11월 23일 오후 6시, 안전 안내 문자가 왔다.

- 오늘 21시부터 서울 전역에 급격한 기온 하강이 예상되오니 가급적 외출을 삼가시고, 외출 시 방한용품 착용 등 보온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제길."

문자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다음 날에 막내딸 지윤이와 함께 동물원 나들이를 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지윤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이다. 내내 따뜻하던 날씨가 왜 하필 그날에 맞춰 추워진단 말이냐!


"지윤아, 날씨가 엄청 추운데 괜찮겠어?"

혹시라도 추운 게 싫어서 그냥 집에서 유튜브나 보며 뒹굴거리고 싶다고 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다.

"어. 괜찮아. 목도리 하면 되지."

지윤이는 날씨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신나 있었다.

"그래... 목도리, 장갑, 따뜻한 물 챙겨 가자."


도시락을 싸갈까 잠시 고민했다. 지하철 타고 오가면서 짐이 많으면 힘들 것 같아 귤 3개와 보리차가 든 작은 보온병, 과자 하나를 챙겼다. 지하철역 김밥 가게에서 지윤이가 간식으로 먹을 만큼의 김밥을 샀다.

"우리 동물원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자."

"응, 좋아."

그때는 몰랐다. 그 넓은 동물원에 밥 먹을 곳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우리가 과천 서울동물원에 도착한 시간은 열한 시쯤이었다. 매표소에서 코끼리열차+동물원입장+리프트 패키지권을 샀다. 다둥이 카드가 있으면 동물원 입장료는 무료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코끼리 열차를 타고 동물원 입구까지 가서 동물원 안에 들어가 리프트를 탔다. 발아래 풍경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안 무서워?"

"아래 그물망 있는데 뭐. 하나도 안 무서워."

지윤이는 안 무섭다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는데, 사실 나는 무서웠다. 나는 리프트가 매달린 쇠줄이 끊어지는 상상과 내가 앉은자리가 뒤로 벌러덩 재껴져 우리가 아래로 꼬꾸라져 떨어지는 상상을 하면서 덜덜 떨고 앉아 있었다. 멀미가 날 것 같은 데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나는 내 생애 마지막 리프트를 탔다.



"윽, 추워."

찬바람이 쌩쌩부는 초겨울의 동물원, 인적마저 드물어 더 춥게 느껴졌다. 우리가 처음 마주한 동물인 호랑이를 보다가 지윤이가 말했다.

"엄마, 나 배고파."

"벌써? 우리 저 앞 편의점에서 라면 사가지고 김밥이랑 같이 먹자."

(동물원 편의점은 라면을 안 판다는 걸 몰랐다)

편의점 문 앞으로 가보니 '금일 휴무'라고 쓰여있다. 옆에 식당도 문이 닫혔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무와 호랑이, 곰 같은 맹수가 사는 우리뿐이다. 우리가 들어가 밥을 먹을 만한 따뜻한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햇볕이 많이 드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김밥과 보리차를 꺼냈다. 오들오들 떨면서 김밥을 입에 넣었다. 눈치를 보니 지윤이 혼자 먹기도 모자랄 것 같다. 나는 잠깐 다이어트를 하기로 했다.



우리 옆에는 중년 커플이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서로 먹여주고 쉴 새 없이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부부는 아닌가 보다. 저쪽에서 어린아이 둘과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걸어왔는데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를 언어를 쓰고 있다. 추운 나라에서 왔는지 별로 안 추워 보였다. 사람이 별로 없으니 지나치는 사람들을 관찰하게 된다. 혹시 여기 동물들도 눈앞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건 아닐까?


동물 우리 앞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곳곳에 적혀있다. 지윤이가 딱딱한 설명서는 안 읽어도 각 동물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나 특이한 점들을 손글씨와 그림으로 예쁘게 꾸며놓은 표지판들은 꼭 읽고 지나갔다.



"저기 편의점이다!"

추위에 떨며 돌아다니다가 편의점 간판을 보고 반가워 달려갔다. 문이 닫혀있다.

"저기 식당이다!"

또 닫혀있다. 겨울이고 평일이라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한참만에 카페라고 써진 곳을 보고 들어갔는데 편의점+카페+식당이 합쳐져 휴게소 식당 같은 느낌의 공간이었다. 지윤이가 좋아하는 우동을 한 그릇 시켜주고, 나는 커피를 마셨다. 나도 배가 고팠지만, 저녁에 더 맛있는 걸 먹기 위해 계속 다이어트를 하기로 했다.

"엄마, 정말 맛있어."

지윤이는 맛있다는 말을 반복하며 우동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퇴근길 지하철이 붐비기 전에 나가고 싶어 발걸음을 서둘렀다. 대부분 다 둘러봤지만 지윤이가 보고 싶어 하는 악어가 있는 곳은 환경개선공사 중이었고, 내가 보고 싶었던 돌고래가 있는 곳은 오늘까지 내부 공사 중이었다. 유인원관도 공사 중이었고, 홍학도 어디론가 들어가 있는지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기린, 사자, 호랑이, 코끼리


네시쯤 동물원을 나왔는데, 벌써 지하철에 사람들이 많아 앉을자리가 없었다. 지윤이가 힘들다고 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엄마, 나 이제 손잡이 잡을 수 있어."

"오, 많이 컸네."

"안 힘들어?"

"서서 가는 거 재밌어."


"동물원에서 못 먹었으니까 아주아주 맛있는 거 먹자."

뭘 먹으면 하루종일 춥고 배고팠던 걸 보상받을 수 있을까? 동물을 보고 와서 고기를 먹기는 좀 미안한 기분이 드니 생선을 먹기로 했다. 집 근처 횟집에 들어가 제철 맞은 대방어를 주문했다. 나는 소주를, 지윤이는 사이다를 따라 건배를 했다. 소주 한잔에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았다. 드디어 다이어트가 끝났다.



"오늘 많이 추웠지?"

"응, 그래도 장갑이랑 목도리 있어서 괜찮았어."

"오늘 악어 있는 데랑 유인원관 못 들어가서 아쉬웠지?"

"응. 그래도 사자랑 기린, 코끼리, 타란튤라 봐서 좋았어."

지윤이는 매 순간 단점보다는 장점을 찾고 있었다. 춥고, 배고프고, 동물들을 많이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아쉬움이 남아야 다음이 있는 거다.

"우리, 따뜻한 날 먹을 거 많이 싸서 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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