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이 오랜만에 숫자들로 빽빽하다. 월급이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옜다, 용돈'이라는 문구와 함께 용돈을 보냈다. 이럴 땐 빛의 속도로 답장이 온다.
'엄마 사랑해요. 하트 뿅뿅.'
일 할 맛 난다. 그다음 나머지 돈은 모두 쓰임이 정해져 있기에 통장 속의 돈은 그저 숫자에 불과해 보인다. 그중에 20만 원을 제외하고는.
나는 석 달째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 대신 산책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운동 겸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서 점심시간에 산책을 했는데, 그 시간이 나의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어 버렸다.
어느 날 생각해 보니,
'내가 점심을 먹지 않고 산책을 하면서 아껴지는 내 점심값 20만 원은 어디로 간 걸까? 돈이 남지를 않네'
그래서 지난달부터 월급이 들어오면 돈을 따로 빼놓았다. 이 중 4만 원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유니세프에 후원금으로 나가고(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것도 나를 위한 선물이다), 나머지 16만 원은 나를 위한 선물을 사기로 했다.
7월에는 뮤지컬 웃는 남자 티켓을 샀다. 이번 달에는 뭘 하지? 나는 괜찮은데 언니가 보기 싫어하는 흰머리를 가리기 위한 염색도 해야 하고, 요즘 부쩍 쭈글쭈글 해진 내 피부에 바를 수분 크림도 필요하다. 쓰지 말고 모아서 명품백을 하나 살까?
아니다. 이 돈은 그렇게 쓸 돈이 아니다.
정해진 생활비 안에서 쓰기 망설여졌던 일, 가족들 다 같이 하기는 부담스럽고 나 혼자 하기는 미안해서 못 했던 그런 일을 하고 싶다. 모아서 쓰는 거 안된다. 이번 달 안에 꼭, 한 번에 써야 한다는 게 규칙이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당장 하고 싶은 게 생각나지 않는다. 9월부터 12월까지는 이미 다 정해놓았다.
9월에는 달리기 대회 (마라톤대회라고 하기는 너무 부끄러운 5km)를 신청했는데, 달리느라고 고생한 나에게 16만 원짜리 점심을 먹여 줄 생각이다.
10월에는 기차 타고 단풍여행을 갈 것이다. 우리 동네에도 단풍 많은데 뭘 거기까지 가냐며 귀찮은 거 싫어하는 남편과 살면서 가보지 못했던 단풍구경, 이제는 혼자 가도 좋을 것 같다.
11월에는 와인을 한 병 사야겠다. 가끔 마시는 3만 원대 와인 말고 16만 원짜리 와인을 한 병 사서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고 싶다. (바뀔 가능성 있음, 남편 하는 거 봐서)
12월에는 올 한 해 내가 감동받은 열 권의 책을 사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에 보내려고 한다. 책을 받은 사람이 나와 같은 감동을 받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것이 나를 위한 선물이다.
예전의 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옷, 가방 등 물건을 사는 것이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여행을 다니는 등 경험을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소비라고 생각했다. 나를 돋보이게 해 줄 비싼 물건들을 지니고 다니지 못함에 속상해하기도 했었다.
얼마 전부터 생각이 달라진 나는 옷이나 가방보다 내 말과 행동, 생각이 나를 더 돋보이게 해 줄 수 있으며 결국 닳아 없어질 물건보다 머릿속에 평생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경험과 추억들이 더 가치 있는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나에게 물건이 아닌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경험을 선물할 것이다.
그나저나 저 이번 달에 뭘 하면 좋을까요? 갑자기 16만 원이 생겼다면 뭘 하고 싶은지 댓글 남겨 주시면 제가 대신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