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부단한 개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약해져서 그 조차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때가 되었을 때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중년이 되고 나니 주변에서 결혼식이나 돌잔치 초대보다 부고를 더 많이 접하게 된다. 한 달 사이에 세 번의 부고를 전해 듣고 장례식장을 다녀오고 나니 지금부터 죽음에 대한 대비를 시작해도 이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가벼이 듣기만 했었는데 병상에서 오래 고생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지인들 이야기를 들으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죽음을 남일처럼 여겼던 것이다.
죽여주는 여자, 소영은 늙은 매춘부다.
표현이 다소 거칠지만 소영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기에는 "늙은 매춘부"라는 단어가 가장 적확하다. 온화한 표현도 찾아보았고 그녀의 삶을 미화시켜 보려고도 했지만 그런 포장은 영화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 영화 속에서도 그녀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없는 이유가 그러할 것 같다.
소영이라는 이름도 과거 청산을 위해 스스로 개명한 이름이었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매춘부였고 미군부대에서 일하다 만난 흑인 군인과 동거를 하다가 아이를 낳았고 키울 수가 없어 입양을 보냈다. 제 손으로 보살펴 본 적 없는 아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를 보호하기를 자처한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아이를 잠시라도 데리고 있는 일이 부담인 형편인데 그녀는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을 벌이기도 한다. 영화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던 장면이 있다. 아이를 데리고 영업을 하려는 소영이 그려진 장면이다.
집을 비우는 동안 돌봐줄 사람이 없어 직접 데리고 나왔다. 멀찍이 떨어져 있게 두었다가 영업이 성사되자 손 붙들고 함께 여관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고 인상이 찌푸려졌었다.
그녀에게 매춘은 일(Job)일 뿐이다?!
하지만 과거 함께 미군부대에서 일했던 동생을 우연히 만났을 때 자신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그녀를 다소 불편해하는 모습이 역력한 것을 보면 그녀도 자신의 직업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는 없어 보였다. 지금은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그 동생의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으며 소영은 여전한 자신의 모습을 설명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다시 만나자는 동생의 바람도 싹둑 잘라 버리고 연락처도 묻지 않고 나중에 연락하겠다며 돌아서 버렸다.
소영이 살고 있는 집에는 성 확정술을 한 주인과 의족에 의지해 다리를 절뚝거리는 옆 방 남자가 함께 살고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배경이 그녀가 매춘으로 연명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 또한 없어 보인다. 탈출할 생각조차 할 여지가 없는 그녀의 환경이 그녀를 탓하지도 못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의아한 부분이 있다. 소영과 다수 노인남성들과의 관계이다. 그녀가 만나고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들여다보면 일회성 관계는 아닌 듯 보인다.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요즘은 왜 안 나오세요?" 라 묻기도 하고, "그분은 몇 달 전부터 안 보이네요." 라며 안부를 묻는다. 그 질문 안에 따뜻함이 묻어나는 것은 기분 탓일까?
아내가 죽은 후로 자주 그녀를 만났고 그녀에게 참 따뜻했다던 노인이 거동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간 병원에서 소영은 어려운 부탁을 받고, 그를 위해 승낙을 한다.
처음으로 그녀는 정말 죽여주는 여자가 되었다.
두 번째, 한 때는 잘 나갔으나 은퇴하고 홀로 남아 삶의 질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낙심한 친구의 조력자살을 의뢰받는다. 높은 산에 올라 등을 떠밀어 주고 벌벌 떨며 홀로 산을 내려오는 그녀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마지막, 아내의 제사를 지내면서 연명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을 결심한 사람에게서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고급 호텔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야경이 멋진 객실에서 둘은 한 침대에서 각자 잠이 든다. 남자는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했고 그녀에게는 두 알을 먹게 권했다.
한 침대에서 둘은 같이 잠이 들었지만 아침에 눈을 뜬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타인의 자살을 도왔지만 세상은 그녀를 혼자 사는 노인의 돈을 노린 살인자라고 비난했다. 가녀린 끈에 매달려 겨우겨우 살아내던 그녀의 삶은 끝이 났다.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 그녀는 함께 살던 사람들과 소풍을 갔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놀이기구를 탔다. 그리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그날 밤 그녀는 경찰에 붙잡혀 갔다.
수갑을 차고 경찰차에 타더니 덤덤하게 담배를 청한다. 세상에서의 마지막 자유를 만끽하려는 듯이.
법은 그녀를 살인자로 만들지는 않은 듯하다.
교도소 수감 생활 중에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마지막은 재만 남았다.
영화는 끝까지 건조하다. 소영을 동정하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 안에는 불안으로 인한 두려움과 분노가 일었다.
한 개인이 평생을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다가 늙고 병들어 죽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오롯이 그 개인의 책임인가. 노후를 준비할 여유도 없이 하루를 살아내기에 급급했던 서민들의 삶이 과연 개인의 무능 때문이었는가.
소영과 그 주변 노인들의 삶은 곧 나의 미래이고 우리 이웃들의 청사진이다.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이웃들이 이와 같이 빈곤하다면 내가 아무리 준비를 잘 해서 건강하고 풍요롭게 노년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외로울 것이다. 함께 노년을 즐길 이웃이 없다면 결국 나 역시도 빈곤 속 노인들을 돕다가 끝이 날 수도 있다.
부모님이 귀촌을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 무덤덤했었다. 연금과 당신 소유의 집 한채로 칠순 이후의 삶을 시골에서 살다가 가겠다는 부모님의 뜻이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늙으면 삭막한 도시보다 고향인 시골이 편하겠지 싶었다. 나도 내 노후는 그렇게 준비해야지 하는 마음만 먹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나의 노년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고 부모님이 겪었을 두려움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자식이 노후를 책임져 주지 않는 세대, 부모보다 자식이 더 가난한 세대를 살고 있는 50년대 출생자들은 죽을 때까지 비극이어야 하는가. 전쟁을 경험했던 트라우마로 오로지 가족만을 지키며 살아온 그들에게 먹고 살만해진 국가는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희망을 버릴 시기는 아니다. 아직 사회적 제도나 정책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개개인이 정신차리고 준비해야 한다. 하나 둘 각성하여 노년을 대비한다면 빈곤한 노인이 줄어들고, 건강한 노인들을 보고 자란 다음 세대들은 지금의 불안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죽도록 일하고 살아도 노후가 가난하다면 어떤 젊은이가 열심히 일할 마음을 갖겠는가.
노인들의 귀촌이 도피가 아닌 전원생활 영위를 위한 이동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