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션펌킨 Nov 30. 2021

귀 끝이 찌릿하게 시린 새벽

정신이 번쩍 들다.

일주일 만에 다시 산을 올랐다. 지난주 21KM를 완주하고 나서 자신감이 붙었다. 날이 추워지면 또 다른 변수들이 생기겠지만 그래도 산행은 계속하리라 다짐하며 걸었다.

새벽 여섯 시, 영상 1도지만 춥게 느껴지지 않은 날씨였다. 건강해지는 만큼 추위도 덜 탄다. 작년 이맘때 이미 두꺼운 패딩 점퍼를 꺼내 입었던 기억이 난다.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오르다 보면 하늘이 먼저 밝아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무 그림자로 내 주변은 어둡지만 하늘은 밝다. 차츰 어둠이 눈에 익어 라이트를 켤 필요가 없어지는 그 시각, 기분이 참 좋다. 

숲 속 길을 어둠을 뚫고 걷다 보면 어느덧 능선을 오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커다란 바위를 타다 보면 산의 나무와 돌이 붉게 물들 때가 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일출이 잘 보일 곳을 찾아 자리를 잡게 된다. 

안양과 과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섰다. 한줄기 연기가 직선으로 피어오르는 모습이 오늘따라 반갑다. 추위로 인해 오래 서 있지 못하고 다시 걸어 올라갔다. 십 여분 정도 걸어 오르니 해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일출을 보는 명소는 아니었지만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서서 한 컷 찍어 보았다.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멋진 일출까지 만나게 되면 덤을 얻은 기분이다.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직장을 다니다가 개인사업자로 개업을 했었다. 커피에 빠져서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다가 결국 카페를 하겠다고 나섰다. 완벽하게 준비되지는 않았지만 작게 시작해서 키워 보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수년간 이런저런 애를 써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세상이 들썩이기 직전에 폐업을 하고 모든 것을 정리했다. 당시에는 비참함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면 운이 좋았다.

그때 가게가 나가지 않았다면 6개월 넘게 남은 계약기간 동안 가게 월세를 내야 했고 내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을 것이다. 다행히 그전에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넘길 수 있게 되었고 가진 것들만 털어내고 끝이 날 수 있었다. 생각할수록 아찔한 시간이었다.

폐업을 결정하고 나서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고 급하게 일을 찾아다녔다. 진입장벽이 낮은 알바부터 무조건 시작했다. 카드 할부금을 모두 갚아야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업장은 정리했지만 남아있는 카드 빚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만 같아 새로운 무언가를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돈을 벌자고 마음먹고 물류센터, 블랙박스 조립, 진단키트 등등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은 망설이지 않고 나서서 했다. 

하지만 그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여전히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아직도 격차가 존재한다고 본다. 물류센터에서 단순한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가 주인공 의식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일하며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은 충분히 퀄리티 높은 생활을 할 수 있다. 여유를 즐기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찾아서 누리는 것이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것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단순 노무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낮춰서 평가하고 깎아내리려는 경향을 보이는 성향이 강하다. 

그런 사람들과 부딪히다 보니 내가 건방진 사람이 되고 입바른 소리 잘하는 무례한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그 공간에서 나는 불편한 사람이 되었고 나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약자를 이용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동료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그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는다는 것이 곤욕스러웠다. 결국 빠르게 돈을 벌어 빚을 갚으려던 내 계획을 포기하고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코로나19로 정당한 명분도 생겼고 부모님께 양해를 얻어 당당하게 백수가 되었다. 

다른 직업을 찾는 동안 공부도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에 도전하기로 했다. 인강으로 수업 듣고 독학으로 공부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험 결과는 긍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포기한 것은 아니다. 합격을 위해 다시 도전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공인중개사 공부를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산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서 밥을 먹거나 술 한잔 하기 어려운 시국이었고 홀로 노래방도 불가했다.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풀어낼 방법이 없어 고민하다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산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산을 타고나서 얻는 성취감에 취해 매번 산을 타게 되고 건강도 좋아지고 있어서 일석 삼조의 이득을 얻고 있는 것이다. 

선택지가 하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선택이 지금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산을 타면서 체력이 좋아지고 완주 거리가 길어질수록 성취감은 높아갔다. 그러면서 자기 효능감이 커져갔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포기하려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다.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지인의 추천으로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운영하는 인증 어플을 설치해서 정상석에서 셀카를 찍고 포인트를 얻는 프로그램에도 참여 중이다. 

언제부턴가 사진을 찍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고 셀카는 기겁을 하고 피했던 내가 정상 인증을 위해 셀카를 찍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이다. 내가 내 얼굴을 보는 것이 낯설고 어색했는데 지금은 덤덤하다.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이렇게 나이가 들었구나. 인정하고 나니 그 뒤는 오히려 편안하다. 

지난주 21KM 완주했던 코스를 걷는 중이었다. 날이 추워서 능선 꼭대기나 계곡 그늘은 쉬어 가기가 적당하지 않다. 먹고 쉬는 동안은 몸이 따뜻해야 다음 코스로 이동할 때 몸에 무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대 공대를 끼고 있는 계곡으로 내려와 볕이 아주 좋고 바람이 들지 않는 자리를 찾아 앉아 식사를 했다. 

찬밥을 눌러 만든 누룽지를 뜨거운 물에 불리고, 달콤 짭짜름하게 볶은 멸치와 콩자반을 반찬으로, 묵은지는 물에 헹구어 물기를 꼭 짜내서 가져왔다. 

조촐하지만 영양 만점, 맛도 완벽한 한 끼였다. 

산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감정들이 올라올 때가 있다.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혼자 조용한 곳을 오래 걷다 보면 가라앉아 있던 부유물이 미세한 진동으로 인해 하나 둘 떠오르듯이 되살아 난다. 수만 가지가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수차례 하다 보면 하나둘씩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의도적으로 처리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마냥 걸으면서 그 당시 그 감정에 충실해 보고 나서 체념하고 끝내버리기가 다반사였다. 

한마디로 혼자 지지고 볶고 하다가 끝내 버리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렇게 의미 없어 보이는 작업을 하다 보면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 감정들이 생기고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 안에 있던 울분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외부 자극에 의해 내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던 것도 스스로 통제가 가능해질 때가 있어 놀란 적도 있었다. 백수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고 부딪히는 일이 거의 전무하다 보니 타인으로부터 자극을 받을 일이 없는 상황이라 그런가 싶었지만 꼭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하다.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에 기분이 나빠질 때면 상대에게서 그 이유를 찾던 내가 온전히 감정에만 집중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는 한 뼘 성장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분명 성찰에 대한 결과라고 믿는다. 

처음엔 10KM를 걷는 것도 힘겨웠다. 집에 와서는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다음 날까지도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그랬던 내가 21KM를 걷고도 거뜬했다. 산행 다음 날에 또 산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다. 산을 탈 때마다 한계에 부딪히지만 완주하고 나서 얻는 성취감은 계속 나를 성장하게 한다.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떠올라 주절주절 쏱아냈다. 그 시간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가 조금도 없다. 

감정의 부유물이 1그람도 없는 후련한 기분이 드는 것은 처음이다. 정말 완전하게 정리하고 끝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반갑다. 새로 태어난 MJ, 반갑다. 

작가의 이전글 죽음의 문턱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