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발자 모드 속 예순한 번째 이야기
작년에는 손님, 올해는 엄마 보호자로서 호주 동생 집을 방문했다. 동생 내외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랍스터회, 랍스터구이, 스테이크, 손수 반죽을 발효시켜 만든 팬케이크에 캐비어를 듬뿍 올린 블리니까지 대접했다. 다음날이 되자 솜씨 발휘해 보지 않겠냐며 내게 동생이 제안했다. 이날을 위해 올봄 내내 요리학원에서 내공을 쌓았다. 계량컵과 조리법만 있다면 요리 초보도 겁먹을 필요 없다. 단 하나의 문제는 여기 내가 만들었던 레시피 종이가 없단 점이다. 서둘러 인터넷에서 학원에서 배웠던 메뉴를 검색했다. 소금으로 간을 맞춰야 하는 하얀 음식은 미각이 둔해서 매번 실패했다. 내 결정은 새빨간 마파두부 덮밥이다. 덮밥이다 보니 따로 반찬도 필요 없었다. 주재료인 두부를 제외하면 파티 직후라 냉장고에는 재료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특히, 요리에 진심인 제부 덕에 동생네 찬장에는 감칠맛을 내는 두반장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요리의 출발은 재료 손질이다. 아일랜드 식탁에 젖은 행주를 깔고 도마를 놓는다. 역시 배운 자의 손길이다. 일단, 파부터 자른다. 왼손에는 칼, 오른손에는 푸른 파를 잡고 1센티 간격으로 느릿느릿 잘라낸다. 이 속도를 예상하고 세 시간 전부터 시작한 요리인지라 전혀 서두를 필요 없었다. 내 페이스대로만 하면 된다. 이번에는 마늘이다. 기계보다 손맛이라며, 마늘 다지기를 시도한다. 파와 같은 방식으로 2밀리 칼질을 한 다음 숟가락 뒷면을 이용해서 꾹꾹 눌러댄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저며지지 않았다. 덩어리 씹히는 것도 식감에 좋을 것 같아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다진 돼지고기를 냉장고에서 한 움큼 덜어내고 전분물도 만든다.
핵심은 양념장이다. 여태까지 만들었던 조리량은 일 인분이 최대치였다. 출근한 제부를 제외하면 삼 인분의 개량이 필요한데, 가늠하기 힘들었다. 평소 요리는 과학이라 믿었다. 다양한 재료가 불과 함께 화학 작용이 일어나면 분명 정률로 맛을 보장하지는 않을 거라 고민되었다. 현직 주부는 일 인분에 삼을 곱하면 되지 않냐고 가볍게 말했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대안이 없어 경험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둥그런 쇠그릇에 걸쭉한 고추장을 세 숟가락 떠 넣는다. 설탕과 고춧가루, 맛술과 진간장, 으깬 마늘과 된장도 투하한다. 모든 양념이 집결하면 쓱쓱 비빈다. 마지막으로 두부를 자를 차례다. 분명 파를 자를 때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지만, 칼집을 낼수록 두부는 작아졌다. 애초 다지려던 마늘은 알갱이가 되고 큼직하게 자르려던 두부는 원자가 되었다. 불을 가하기도 전에 물리작용부터 개시되었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켠다. 커다란 웍을 올리고 기름을 두른다. 중식은 불맛이라 여겨 강한 불로 맞췄다. 파를 집어넣자마자 기름이 퍽퍽 뛰면서 팔에도 한 방울이 안착했다. 급하게 불을 끄고 방탄 목적으로 고무장갑을 착용했다. 재개할 때는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 나무 주걱으로 파를 젓는다. 불이 세니 파가 금방 탔다. 불을 낮추고 다짐육도 넣는다. 요번에는 화력이 약해서 고기가 안 익는다. 세기를 높이자 또다시 파가 탄다. 어쩔 수 없다. 탄 파는 먹을 수 있어도 덜 익은 돼지고기는 안 된다. 검게 그을린 파는 양념장으로 위장해 보기로 했다.
변장 전략을 구사하고자 양념장을 출격시켰다. 훈작한 파에 빨간색을 입히다가 양념이 진해질 때쯤 두부를 투입했다. 이제는 제법 음식의 모양새를 띈다. 두부에도 붉은 염색을 시도했다. 이미 자그마해진 두부는 주걱질에 점점 더 으스러졌다. 최후 비법으로 전분물을 부어 넣고 쪼리다가 완전히 불을 껐다. 오목하고 넓은 접시에 밥을 뜨고 그 위에 마파두부 소스를 올렸다. 세 식구는 원탁의 식탁에 둘러앉아 만찬을 시작했다. 엄마와 동생은 맛있다며 연신 엄지를 치켜세웠다. 원자 요리는 대성공이다. 뿌듯함에 고개를 돌렸을 때, 보조 식탁 위 두반장은 뚜껑이 꽉 닫힌 채로 덩그러니 있었다.
※ 안내: 앞서 발행한 동명의 이야기 〈원자 요리〉를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