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니애 Jan 11. 2024

[프롤로그]

히틀러의 피가 흐르는 자, 간호사를 꿈꾸다

 브런치 독자 MZ 세대 중, MBTI 검사 안 해본 사람은 한 번 손 들어 보세요.


 정식 검사는 안 해봤을지라도 방계로 나온 비스무리한 성격 테스트는 많은 이들이 해봤으리라 예상한다. 새로운 사람과 사귀는 것이 어렵느니 쉽느니 숙제가 있으면 닥칠 때 하느니 미리 하느니, 이런 류의 질문이 나왔다면 백프로다.

 밀레니엄 시대에 혈액형별 유형이 싸이월드 일촌들을 분류했다면 Z에 와선 MBTI가 인스타를 장악하며 팔로워들을 분류하고 있다. 삼라만상 천 길 물속 인간군상을 고작 '16개'로 나눔이 어불성설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형별 서술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마치 용한 점쟁이가 사주풀이 하듯 딱 딱 맞춰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정자세로 고쳐 앉는다.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점입가경으로 빠져들며 '오오!' 하는 탄성과 함께 물개 박수를 치게 되는 것이다. 본인도 그 물개 중 한 마리임을 고백한다.


 MBTI 16가지 유형 중 가장 차갑고 인간미 없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인간 유형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ESTJ.

 따스한 감정 따위 무용한 것일 뿐, 실용과 논리와 효율이 중요하고 눈치 없이 팩폭 잘 날리는 사람 되시겠다.




 첫 MBTI 검사는 고등 2학년 때였다. 수련회에 MBTI 전문 강사님이 오셔서 검사를 진행하였고 같은 유형끼리 학생들을 분류하여 조를 묶었다. 전지 한 장과 매직 몇 개를 주며 내준 과제는 '성격유형 소개와 1박 2일 여행경비 짜오기'. 삼삼오오 빈 공간을 찾아 모여든 무리 중에서 "이거 어떡해~." 하는 탄식이 여기저기 들려왔다. 누가 쓸 거냐 네가 쓸 거냐 옥신각신 하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ESTJ 들끼리 모인 조에서 미루기란 없다. 시킨 이도 없건만 어느새 매직은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다. 이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어딜 갈 거야?"

"서울 갈까?"

"뭐 타고?"

"자동차로 간다고 하자."

"기름값이랑 톨비 계산해야겠네."

"밥값은 끼니당 얼마 예산 잡으면 좋을까?"

"한 사람당 5천 원씩 잡고 곱하기하자." (20년도 더 된 물가라 가능했다)


 여행경비 플랜의 발표자료는 심지어 그 짧은 시간 안에 도표로 작성되었다.


"성격 소개는 어떻게 하지?"

"1번부터 순서대로 10개 정도만 써보자."

"그럼 내가 자료 읽어줄게, 일단 1번은 어쩌고 저쩌고..."


 막힘이란 없었다. '일' 또는 '과제'라는 걸 이토록 군더더기 없이 신속하게 끝낼 수 있다니! 그동안 어떤 협업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이 좌심실에서 뿜어져 나와 동맥과 정맥을 휩쓸며 몸 한 바퀴를 돌고 우심방으로 들어오는 신선함. 세로로 펼쳐진 전지에 오와 열을 맞춰 자리를 찾은 간략한 핵심 단어들. 발표할 내용을 다 쓴 뒤, 굳이 '끝'이라는 글자와 방점을 남기며 맺음까지 명확히 고한 완벽한 결과물이었다. 차례가 가까이 올 때마다 초조한 이들이 있기 마련이건만, ESTJ에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다.


 마침내 발표의 시간.

 "와. 장들만 나간다!"

 어디선가 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맞아, 맞아' '와, 진짜 그러네' 하는 탄성도 잇따라 들려왔다. 어라? 그러고 보니 여기에 뭐라도 한 자리 안 차고 있는 애가 없다. 반장, 서클장, 전교부장, 참 골고루도 모였다.


출처 PIXABAY


 ESTJ들이란 이런 족속이다. 조직의 선두에 서서 계획과 효율을 바탕으로 이끌어가는 엄격한 관리자형. 군인, 사업가, 행정가 등 듣기만 해도 빡빡한 직업군의 기질이라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김구라, 짱구는 못 말려의 철수(아 점점 재수가 없다), 도날드 트럼프, 대처 수상, 히틀러.


 히틀러라니, 히틀러라니!


 극구 부정해 보지만 날 사찰 연구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묘사가 찰떡이다. 유년시절, 왜 여학우보다 남학우랑 노는 게 편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동안 원인도 모르고 미움 샀던 사건들이 해결되었다. 3년 뒤 대학에서 재검을 해도, 또 3년쯤 뒤 인터넷으로 약식으로 하는 test에서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혈관 속엔, 숨기지 못할 히틀러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 인정하자, 세계 2차 대전 당시에 태어났으면 히틀러까지는 못해도 얌전히 있었을 인간은 아니다. 몸 어딘가에 낙인이 찍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낙인이 한창 선명해지는 20대, 진지하게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대학 3년 차에 '역시 이상보다는 현실'이 우선이라는, 인문학 취업의 슬픈 한계를 마주했다. 다니던 학과에서 미래를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필자는 자퇴를 하고 새로운 진로로 방향키를 틀어버렸다.


 ESTJ 주제에 감히 넘본 직업이 '간호사'였다.






※ 모든 ESTJ들이 AI, 성격파탄자, 혹은 재수 없는 인간이 아님을 간곡한 마음으로 밝힙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