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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Jan 26. 2024

VIPS에서 세 접시밖에 못 먹은 이유

 뷔페는 기본 다섯 접시가 국룰이다. 애피타이저 한 접시, 본식 세 접시, 디저트 한 접시. 꽤 많은 금액을 지불한 본전 뽑기를 감안하면 꾹꾹 밀어 넣어 일곱 접시도 클리어. 무려 십여 년 전의 VIPS라면 더더욱 그렇다.

 인터넷에 뜨는 감성적인 맛집이 가리키는 좌표가 취향의 다양성에 따라 선택의 폭도 넓어진 시절이다. 시절을 좇다 보니 자연스레 '기념일에 여기는 꼭 한 번'이란 공식이 사라졌지만 라떼만 해도 젊은이들의 돈 좀 내고 기분 내러 가는 코스엔 VIPS가 반드시 리스트업 되었다. 떠오르는 식재료 훈제연어를 마음껏 즐길 수 있고 메뉴들의 고급화를 내세운 VIPS는 동종업계 중에서도 퀄리티가 높은 편인, 꽤나 설레는 뷔페식 레스토랑이었다.


 무려 그런 VIPS에서, 미혼 여성이 90%를 차지하는 병동 회식으로 디너를 하겠다는 것 아닌가. 이게 웬 일이야, 멋 모르는 신규들은 불편하다 하면서도 내심 기대를 하며 분칠을 두드리고 갔더랬다. 의국을 끼고 하는 회식은 목구멍에 기름칠께나 했지만 병동 회식은 가봤자 고작 샤브샤브집 정도였으니까.

 오래간만에 원피스 차려입고 우아하게 접시를 들고 병동이 아닌 샐러드바를 라운딩 하며 고루 만끽할 마음의 준비를 마쳤는데, 수선생님과 최고 charge 선생님이 눈짓을 주고받더니 다 앉아보랜다. 그리고 최고 charge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일단 맛있게 먹어."

 일단? 일단이라고? 그럼 다음 이단은 뭐가 있길래?


  이곳은 장례식장인가 레스토랑인가.

 뷔페까지나 와서  접시를 겨우 비우는 삼 년 차 아래들은 일장을 치르는 종갓집 조신한 며느리들처럼 다소곳하게 앉아 조용히 입만 오물거릴 뿐이었다. 서로 눈치만 살피며 필요하지 않은 말은 최대한 음식과 함께 삼켜 먹어야만 했는데 그 조차도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단체석 긴 테이블 중간에 보이지 않는 시공간의 벽이 있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수간호사 선생님과 그 양 옆으로 연차순으로 앉은 4년 차 이상의 선생님들이 그토록 화기애애하고 맛있는 식사를 이어갈 수가 없다. 우린 장례식장 국화 병풍쯤 하려고 여길 왔나 보다.


 "다 먹었니?"

 수간호사 선생님이 고상하고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의 여인들을 둘러보았다. 앗, 디저트 아직 남았는데. 포크를 쥔 손이 아쉬움에 떨렸지만 그보다 더한 떨림은 역시 '일단'이라는 예고편의 파장에서 오고 있었다. 긴장된 공기 속에 레스토랑의 음악은 더 선명하게 커지고 털은 쭈뼛쭈뼛 선다. 시선은 바로 들어서도 안되고 완전히 내리 깔아서도 안된다. 60도 아래가 적당하다. 웃고 있으면 미친년이지만 혼나서 주눅 든 표정도 안된다. 눈은 살짝 측은하게, 입꼬리는 올릴 듯 말 듯.

 형식적인 수고 치하의 말씀을 마친 수선생님은 병동 서열 넘버 원 선생님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자, 난 네가 어떻게 하는지 조용히 관전하겠어, 알아서 잘 처리하렴'이라 말하며 여우 뒤로 물러나 있는 배부른 호랑이처럼. 도대체 내가 왜 비싼 밥을 얻어먹으면서 욕도 같이 얻어먹어야 하지? 눈치코치 부족한 ESTJ는 선생님들이 오늘 단단히 벼르고 있는 주제에 대해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제가 무얼 잘못했나요?', 백치 한 스푼 넣은 눈빛으로 경청한 넘버원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서열 잡기 혹은 똥군기 잡기의 주제는 '시시덕거리지 마라'.


 "너희들, 병동 생활이 익숙해지니까 윗 선생님들이랑 너네끼리랑 조금 편해진 건 알아, 그렇지만 위아래가 없는 건 아니잖니?"


 아... 이거였구나.


 "유화야, 넌 할 말 없니?"

 "수미야, 너도 할 말 있으면 해."

 발언권은 넘버 원에서 투로, 쓰리로, 다음 연차에 차례대로 내려오며 한 마디씩 더해지고 시시덕거림의 범위도 넓어졌다. 주치의들이랑 농담받아먹기 하지 마라, 드레싱 전문 간호사들이랑 장난치지 마라, 큰 소리를 내지 말아라. 굳이 꼬집어서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이 모든 명령어들의 앞에는 다음의 수식어가 붙는다.

 '윗년차 선생님들 앞에서 감히'.

 우아하게 룸에 앉아 나긋나긋, 교양 있게 훈계하는 것 같지만 그냥 속된 말로 나대는 게 싫었던 거다. 3년 차 선생님들은 시시덕거리느라 선생님들 일을 '먼저' 살펴서 같이 도와드리지 않은 것까지 싸잡아 혼이 났다. 신규는 바로 윗 선생님들이 혼나는 걸 보면 알아서 깨갱이니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다. 익숙하지 않은가, 집에서 엄마가 맏이를 혼내면 동생들은 알아서 제 밥그릇 챙긴다. 이날, 당시 호텔이하 최고급 샐러드바로 여겨지던 VIPS에서, 아래 연차 중 세 접시를 넘긴 용사는 아무도 없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빛만은 형형했던 선배들을 앞두고 지구촌의 다양한 맛이니 훈제연어니 작고 소중한 디저트니 하는 것들이 수월하게 식도를 넘어갈 수 있었을 리가.


pixabay 출처, VIPS와 무관합니다.



  여인이지만 같은 여인네들의 감정선에 살짝 눈치가 모자란 TJ 에겐 여간 곤혹스러운 일들이 아닐 수 없었다. 모르면 반대로 해석하라는 여자언어 초보 입문단계에서 매일이 낙제 점수였다. 어려운 눈치코치의 세계, 여자 언어, 감정 살피기. 10년도 더 전의 이야기이지만 병원이란 곳은 전공서엔 나와있지 않은, 내가 배워야 할 새로운 문명이 참 많았다.

 사실 ESTJ라 힘든 부분은 다문 서열잡기에 끝나는 건 아니었다. 분명 인계받을 때는 계획이 순조롭게 수립되었으나 하루에도 몇 번씩 빵빵 터지는 이벤트에,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들로부터 적잖이 스트레스받기 일쑤였다.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운 사람에게 안성맞춤 고문이랄까. 특히나 졸병에겐 더할 나위 없었음이다.

  세월이 흘러 병동생활에 침식되고 결혼생활로 풍화되고 나니 그까짓 눈치가 뭐라고 다섯 접시 못 채운 그 회식조차 아쉽게 추억된다. 혼나더라도 때깔은 좋아야지, 시치미 떼고 내적 쾌재로 '아싸, 빕스!'를 솔직하게 외친 다음 배 안으로 소중하게 모실 것을.

  이런 여유가 생긴 건 간호사 생활보다 독한 삼 남매 엄마 생활 덕분일 테다. 남편과 아이들의 기분을 살펴야 하고 육아를 하며 맞닥뜨리는 수많은 돌발상황들, 내 손에서 시작과 끝을 맺게 되는 집안 살림. 아홉 군데의 유아보육 교육 기관을 거치며 만난 친구맘들과의 관계. 그러다 보니 이제는 제법 여자들의 틈바구니에 감쪽같이 스며들어 제법 공감의 맞장구도 적절히 끼워 맞출 재주도 생겼다. 도리어 남편과 아들의 언어에 통역이 필요한 반전이 찾아온 상황이랄까.


 이렇게 깎여지지 않았던 과거의 쓰니애 간호사. 인문계 취업의 벽을 피해 돌아온 안정적인 직업. 적당한 사회적 인지도와 그럭저럭 괜찮은 수입. 그 와중에 봉사와 희생의 아이콘. 활동적인 성향을 충족시킬 탈 문서직. 어느 하나 놓치긴 싫어서 두 마리 토끼도 모자라 그물 던져놓고 모조리 잡아버리겠노라 꼼수 부림으로 택한 직업이었음을 숨기지 않겠다. 빈틈없이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생각했었지. 

 졸병이 된 ESTJ, 꾀부렸다가 크게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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