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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 용미 Jul 05. 2024

결코 평범하지 않은 미국 생존기

13. 공짜 뉴욕 여행 2

   

  두 번째 날은 걷고 또 걷고 다시 걸었다. 그때 우리 부부는 젊었다. 조금 무모했고 많이 무식했다. 지하철에서 버스로 환승할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아침에 월스트리트 지하철역에서 내린 후, 맨해튼의 남쪽을 계속 걸었다. 


  월스트리트 거리를 걸으며 뉴욕 월가의 상징인 청동 황소상의 심벌을 만졌다. 부자가 되기보다 하고 싶은 것을 머뭇거리지 않고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유아차를 뒤로 한껏 젖혀 두 아이를 태웠다가, 둘째를 내려놓고 걸렸다가, 잠깐 쉬기도 하면서. 2학년이던 첫째는 계속 걸으며 따라왔다.  

   

  911 메모리얼 박물관에 갔다. 수많은 희생자들을 기리며 그 사건을 잊지 않으려는 미국인들의 정신과 마음에서 감동을 받았다. 먹먹한 마음으로 최남단의 하버까지 걸어가 바다를 보고 우리는 다시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날 저녁은 차이타 타운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오렌지 치킨과 요리들을 기분 좋게 배불리 먹었다. 전날의 미안함을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싶었던 거다.(결평미생 12편 참고) 


  그리고 대망의 야경 포인트로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기로 했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정말 아름답고 긴 다리였다.  우리는 약간 지쳐 있었지만, 남편과 난 가성비를 높여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쳤던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아무런 불평 없이 따라다녔기에 힘들어한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브루클린 브리지는 웅장했다. 밤이 되자, 다리에 걸린 전등이 하나, 둘 켜지고 와인이 생각날 만큼 낭만적인 밤이었다. 그러나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첫째가 다리가 아파 더 이상은 못 걷겠다고 주저앉았다.  2학년이지만 덩치가 있는 아들은 우리를 따라 하루 종일 걸어 다녔던 거다. 둘째와 셋째는 유아차에 타고 있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남편이 첫째를 업었다. 남편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을 텐데, 방법이 없었다. 나는 두 아이를 태운 유아차를 밀고 그렇게 한동안 또 걸었다. 남편마저 힘들어 멈추자, 내가 나섰다. 몸무게가 나와 비슷한 첫째를 업고 5분도 채 못 가서 다시 주저앉았다. 한참을 쉬고 나서야 다시  걸어서 버스 정류장에 가 버스를 탔다. 버스기사가  지하철 환승이 가능하다고 알려준 덕에 차비를 아끼고 결국, 밤늦게 숙소로 왔다.

 

  첫째는 뉴욕 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아빠 등에 업혀 건넌 브루클린 브리지란다.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와~ 지금 생각해도 참 지독한 엄마, 아빠였다. 택시 한 번을 안태워주고(택시를 타 본 경험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진짜 몰랐다.) 도대체 아침부터 밤까지 무슨 고생이었나 싶다. 아찔하고 어질어질한 경험이 내 마음속 깊숙이 남았다. 

     

  마지막 날. 녹초가 됐을 법도 한데, 우린 지치지 않았다. 그때는 젊었던 것 같다. 자고 일어나면 피곤한 줄을 몰랐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밥을 해서 도시락을 쌌다. 이번에는 센트럴파크에서 우아하게 점심을 먹어보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뉴요커들처럼 점심때 피크닉 나온 기분을 맛보고 싶었다.

      

  우리는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갔다. 이번에는 차를 가지고 갔다. 박물관에 주차하고 그 주변을 돌아다니기로 한 것이다. 워싱턴 D.C. 자연사 박물관을 놀이터처럼 돌아다니던 우리는 또 다른 세계를 만났다. 더 다양한 공룡의 뼈와 유인원의 두개골 등 진화에 관한 많은 것들이 알기 쉽게 전시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봐도 모자랄 정도였다. 단돈 5달러에. 원래 입장료는 비쌌다. 하지만, 기부제도가 있어서 원하는 만큼만 기부하고 관람이 가능한 거였다. 얼마나 멋진 제도인가. 브라보!! 나는 쾌재를 불렀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기부금을 내고 들어갔다. 어른 둘, 2달러.(「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다가 2018년부터는 기부금 입장이 제한됨을 알았다. 2024년 현재는 성인 입장료는 30달러 정도이고 학생이나 뉴욕 거주자를 중심으로 기부금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프랑스 왕국의 화려한 가구들과 유럽의 기사들을 만났다.  금빛 찬란한 가구들과 은빛의 빛나는 기사들이 예전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었다. 섬세하고 화려한 디테일에 홀딱 반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그때로 돌아간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집트 스핑크스와 실제 미라도 기억에 남는다.   

    

  MOMA(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는 기업이 후원해 주어 금요일 4시부터 8시까지 무료입장이 가능했다.  물론 1시간 넘게 줄을 서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겨우 마감 한 시간 전에 입장해서 뭉크의 <절규>를 영접했다. 감상을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다.  교과서에 나온 뭉크의 작품 앞에 서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웠다. 기다란 줄을 서서 차례로 사진을 남겼다. 모네의 그림도 보고 수많은 유명 작품들을 직접 보며 눈이 호강했다. 아이들은 이게 뭔가 싶었을 것이다. 지루해하고 장난을 치며 돌아다니는 아이들의 성화에 후다닥 보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림과 작품들 앞에서 눈물이 나도록 나는 제일 좋았고 감격스러웠다. 엄감생심 감지덕지였다고 할까.  

    

  백 년을 훌쩍 넘겨온 세월의 작품을 마주하고 보니 그 작가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어쩌면 연결되는 것 같다는 환상에 젖었다.  그 시대의 향기를 맡으며 뭉크의 <절규>는 뭔가 고민과 아픔일 거라는 짠한 마음으로 이해했다. 당시에 눈물 나게 아끼며 여행을 했던 우리의 상황이 발악 같기도 했고 여행에 목마른 절규 같기도 했던 것 같아서.     

 

    MoMA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내 인생에 다시 오지 못할 무릉도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참. 

  우리는 계획대로 센트럴 파크에서 점심 도시락을 꺼냈다. 미국식 스티로폼 도시락에 밥을 담고 반찬으로 소시지, 볶은 김치 그리고 김을 챙겼다. 

  그런데, 대참사가 벌어졌다. 11월의 뉴욕은 사실 꽤 춥다. 매서운 바람과 기온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펼치는 순간, 돌풍 같은 바람이 우리를 덮쳤다. 흙먼지가 바람에 날려 눈을 뜨지 못하는 사이 구운 김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것이다. 남편과 나는 날아간 김들을 주워 담고 펼친 도시락을 닫고 정리해야만 했다. 차디찬 밥과 날아간 김은 매서운 뉴욕 거리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메뉴였다. 정말 아찔한 기억이다. 

    

  배고픈 아이들과 미술관들을 둘러보고 우린 밤에 쉑쉑버거를 먹었다.  줄을 서서 먹는 기분이 꽤 좋았다. 여느 햄버거랑 얼마나 다를까 싶었지만, 신선한 야채에 육즙을 품은 쇠고기의 맛이 잘 어우러졌다. 뉴욕 맨해튼에서 먹는 햄버거의 맛이라니, 말로 다 못한다. 그 어떤 햄버거와 비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의 4박 5일의 뉴욕 여행은 끝이 났다. 지옥 훈련 같은 걷기와 배고픔 참기, 입장료 할인을 위한 기다림, 초라함을 견뎌야 하는 마음까지. 모든 지옥을 모아 놓은 종합 ‘벌’ 세트 같은 여행 같지만, 우리에게 뉴욕은 여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첫 번째 여행지다.     


WE LOVE N.Y.               


청동 황소상 밑에서 나


우리가 먹은 쉑쉑 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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