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아파트
유학길에 오른 지 2년이 넘었지만 캠핑 말고 여행다운 ‘여행’은 아직 못했다.
어느 날, 남편 실험실에 인도출신의 새 학생이 왔다. 뉴욕에서 메릴랜드 대학교로 옮겨온 Siva는 계약기간이 남은 아파트가 뉴저지에 비어 있단다. 그 아파트를 우리에게 공짜로 빌려 주겠다고도 했다. 우린 기꺼이, 감사히 받아들여 뉴욕 여행을 계획했다.
꺅!!
캠핑 말고 첫 여행이다! 그때가 2012년 11월, 추수감사절 연휴를 며칠 앞둔 때였다.
"아파트라니 잘 됐다."
음식을 해 먹을 수 있겠다 싶어 나는 또 바리바리 음식부터 준비했다. 어디 어디를 가고 야경으로는 어디가 좋은지, 나름 동선을 고려한 하루하루의 계획을 세웠다.
여행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설레고 가슴 벅차오르게 했다.
빈 집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집에서 침대로 사용하는 도톰한 놀이방 매트와 침낭, 전기밥솥, 냄비, 프라이팬, 코펠용 식기, 수저까지 다 챙겼다. 차 트렁크를 가득 채우고 아이들이 탄 좌석 통로 사이사이까지 아이스박스와 물을 끼워 넣었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짐을 실었다.
아이들도 뉴욕에 간다는 말에 신나 있었다. 우리는 하루라도 아끼고 싶어 남편 학교가 끝나자마자, 그날 밤에 떠났다.
처음으로 4박 5일, 뉴욕 여행을 떠난 것이다.
메릴랜드에서 뉴저지까지 거의 다섯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출발했더니 자정이 다되어 도착했다. 짐이 너무 많은 데, 아파트는 다행히 1층이었다. 아이들은 비몽사몽인데도 짐을 하나씩 들고 날랐다. 연신 하품을 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얼른 재워야지.'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아파트의 상태가 엉망이다. 이사를 나간 아파트는 텅 빈 공간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아니었다. 급하게 도망이라도 친 것처럼 아파트 내부는 그야말로 쓰레기로 가득했고 서 있을 공간이 없었다. 여행이라는 희망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꺼져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얼음이 되어 꼼짝 못 했다.
남편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혼자서 조용히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매트를 깔고 아이들을 먼저 눕혔다. 그제야 나도 움직였다. 아이들 옷을 갈아입히고 잠자리를 봐주었다.
“매트 밖으로 나오면 안 돼. 얼른 자~아.”
남편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화장실 청소도 하고 쓰레기들을 밖으로 내놓는다. 나도 부엌으로 가서 가져온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고 그릇들을 정리했다. 우리 둘이 부지런히 움직였더니 제법 깨끗해졌다. 우리도 매트에 누웠다. 옆에서 자는 남편을 보니 조금 안쓰러웠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을 뿐, 누구의 잘못은 없었다. 아파트를 내어 준 Siva에게 지금도 무척 감사하고 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뉴저지다. 뉴욕까지 한 시간 거리에 있다. 곤히 잠든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을 보며 내일의 여행만 생각했다.
다음 날, 전기밥솥에서 밥이 되어가는 소리로 아침이 요란했다. 나는 도시락을 싸느라 새벽부터 분주했다. 아침은 먹고 출발, 점심은 도시락으로, 저녁은 사 먹기로 했다. 입장료도 내야 하고 물가가 워낙 비싸다는 뉴욕에서 아낄 수 있는 것은 모두 아껴야 했다.
드디어 뉴욕 맨해튼으로 출발! 우리는 스테이든 아일랜드 선착장으로 가 배를 탔다. 매일 출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라고 했다. 이것도 공짜란다. 우리는 배 위에서 뉴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을 봤다. 횃불을 들고 서 있는 멋진 여신을 아주 멀리서 그냥 그렇게 봤다. 뉴욕 지하철은 소문대로 조금 지저분했다. 그런 지하철도 신기해서 기념사진을 마구 찍었다.
맨해튼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세련된 분위기의 뉴요커들은 좁은 인도를 빠르게 걸었다.
타임스퀘어는 화려한 전광판들이 저마다의 불빛들로 번쩍번쩍했다. 그 눈부신 번화가 한복판에서 우리는 웃으며 포즈를 취했고 사진을 찍었다. 진짜 뉴욕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노란 택시와 오픈카처럼 지붕이 없는 2층 관광셔틀가 지나갔다. 에너지 넘치는 젊고 밝고 힙한 분위기가 내 심장을 흔들었다.
매년 12월 31일이면 카운트다운을 했던 뉴욕의 한가운데, 바로 그곳에 우리가 있었다. 빨간 계단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높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우리 다섯 명의 얼굴을 한 장의 사진에 넣자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해가 저물기를 기다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멋진 야경을 보기 위해서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은 아침에 본 자유의 여신상 흉내를 냈고 장난을 쳤으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설명을 들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분 만에 86층으로 올라갔다. 어마 무시한 높이에 올라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안전을 위한 철조망들이 있어 밑을 내려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멀리까지 끝도 없이 펼쳐지는 불야성 같은 불빛과 마천루 숲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얼마나 기억할까.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는 벼르고 벼른 저녁을 먹기 위해 코리아타운으로 갔다. 한 번 사 먹는 거라 메뉴에 많은 고민을 했다. 거의 몇 바퀴를 돌고 돌아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킨을 먹기로 했다. 아이들이 아직 맛보지 못한 코리안 스타일의 교촌치킨 맛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쩐지 분위기가 어둡고 컴컴하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자,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야단이다.
남편 표정이 별로다. 술과 담배를 하는 사람들과 섞여 가족들이 올만한 곳이 아니라는 거였다. 남편의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마음이 상해 버렸다. 나도 꽤 배가 고팠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지만, 나는 그대로 식당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온 가족은 그 길로 지하철을 타고 뉴저지 숙소까지 왔다.
밤 10시가 넘도록 밥도 먹지 못한 아이들에게 아침에 한 밥을 먹이고 재웠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남편을 오해했다. 첫 외식에 돈이 아깝다고 생각해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행을 괜히 갔다고 생각했던 거였다. 어지러웠던 숙소를 보며 속상함이 쌓이고 뉴욕 여성들이 신고 다니던 부츠를 보며 상대적으로 초라해진 내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나 보다.
남편이 아깝다고 생각했을 리 없다. 아끼는 것은 매번 내쪽이었으니까.
맞지 않는 남의 옷을 입은 것 마냥 불편했던 마음들이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밀려왔던 거였다. 그냥 집에 있었으면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고 못난 생각을 했다.
치킨을 잔뜩 기대했을 아이들에게 한없이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남편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 혼자만의 마음이었다고. 이제 와서 고백해 본다.
결코 뉴욕에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