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치낚시와 블루크랩
사촌 오빠네 가족이 차로 40분 거리에 살았다. 오빠부부는 낚시를 좋아해 자주 바다로 나가 갈치를 잡았다고 자랑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으나 싱싱한 은빛 갈치를 낚은 사진이 전리품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 킵토피크 주립공원(Kiptopeke State Park)에 가면 배를 타지 않고 다리 위에서 갈치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증명해 보라고 오빠를 자극했다. 한국에서도 해보지 못한 갈치낚시에 한껏 구미가 당겼다.
몇 주 후, 우리는 버지니아 주에 있는 킵토피크 주립공원으로 떠났다. 우리 가족은 캠핑 장비 하나 없이 오빠만 믿고 따라갔다. 오빠네 5인용 텐트하나와 코펠, 낚시 용품과 물놀이 용품이 다였다. 7인승 시에나에 우리 식구 다섯과 오빠랑 오빠 딸만 함께.
미국에서의 첫 캠핑이었다.
미국 동쪽 끝,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을 건너 길게 바다로 뻗은 곶의 최남단이 킵토피크다. 대륙 끝 푸른 대서양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깊고 파란 물감이 융단을 깔아 놓은 듯했다. 그 유명한 버지니아 비치 건너편이다. 메릴랜드 주 그린벨트에서 버지니아 주 킵토피크까지는 고속도로를 달려 4시간쯤 걸렸다. 주를 넘나들지만 행정구역상의 경계는 따로 없고 고속도로 통행료가 없다는 점은 여행의 커다란 행복이었다. 가끔 유료고속도로가 있으나 우리는 무료 길을 이용해 고속도로 통행료를 낸 기억은 없다.
우린 예약해 둔 캠핑 자리에 텐트를 짓고 돗자리를 폈다. 싸 온 도시락으로 대충 배를 채우고 제일 먼저 바다로 뛰어들었다. 따가운 태양아래 빛나는 바다와 반짝이는 모래가 펼쳐져 있었다. 시원한 바다로 들어가 물장구를 쳤다. 아이들을 쫓아다니다 지치면 일광욕을 즐겼고 모래성도 쌓았다. 밀려오는 파도에 모래성을 내맡기고 조개껍데기도 줍고 꽃게를 쫓아 달렸다. 환상적인 하루 해가 금세 저물었다.
아이들은 씻고 나와 배가 고프다고 야단이었다. 그릴에 불을 피우느라 우왕좌왕, 새 밥도 짓지 못했다. 그런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어 가스버너를 켜고 프라이팬에 소시지를 잽싸게 굽고 김과 김치를 곁들여 아이들 밥을 먹였다. 배가 부른 아이들은 금방 자리에 누웠다. 텐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유난히 컸다. 아이들을 재우는데 눈치 없는 불청객이라고 나무라고 싶었지만, 빗소리는 꽤 운치 있었다.
나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지어내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아이들을 꿈나라로 어서 보내고 싶었다. 물놀이로 피곤했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그 사이 빗방울이 굵어졌다. 밖으로 나가보니 남편은 비닐포대를 벌서듯 들고 서서 비를 막고 그 아래에 사촌오빠가 손수 재워온 소갈비를 숯불에 맛나게 굽고 있었다. 남편은 비를 그대로 다 맞고 있었지만, 함박웃음을 짓고 소갈비에 군침을 흘리는 모습이 꼭 아이 같았다.
다 구워진 짭조름하고 달달한 갈비냄새가 우리 위장을 요동치게 했다. 우린 갈비구이를 들고 시에나 안으로 들어갔다. 좌석을 접어 최대한 뒤로 미루고 바닥에 자리를 깔았다. 우리 셋 다 젖은 몸이라 어쩔 수 없었다. 갓 지은 쌀밥과 맛있게 구운 소갈비가 눈물겨웠다. 대서양 앞바다에서 깊고 진한 한국의 맛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굵은 빗줄기에 굽느라 애를 쓴 뒤 먹는 맛은 유달리 더 맛있었다. 젖은 생쥐 세 마리가 자동차 안에 숨어들어 비밀스럽게 나눠 먹는 음식의 맛을 그 누가 알까. 오밤중 불꽃같은 맛을.
밤은 끝도 없이 아름다웠다. 우리는 술에 취했고 이야기에 취했다. 우리 셋은 너무나 가깝고 친밀하게 은밀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평생 있지 못할 첫 캠핑의 추억이다. 비와 양념갈비, 향긋한 술 한 잔 그리고 우리 셋. 가끔 골목길을 걷다 갈비 냄새를 맡을 때, 그때가 무지무지 그리워진다.
다음날 드디어 낚시를 하러 갔다. 오빠가 갈치를 잡은 포인트에는 일찍부터 현지 낚시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의 물고기 바구니에는 커다란 사이즈의 물고기들이 여럿 있었다. 기대가 풍선처럼 부풀었다. 바다낚시채비를 마치고 어른들과 아이들이 낚싯바늘을 시원스럽게 바다로 던졌다. 닐이 풀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낚싯대는 활처럼 휘어졌다 바늘을 물에 담그고 우아하게 허리를 폈다. 푸른 바다는 아름답게 출렁이고 우리 모두는 낚싯줄 끝에 떠 있는 찌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매번 허사였다. 초보인 아들이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건져 올린 것이 전부였다. 미국의 엄격한 사이즈 제한 때문에 작은 물고기는 다시 살려 주었다. 사촌오빠는 실력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워하며 끝까지 낚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끝내 갈치는 구경도 못했다. 낚시마저 늘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것이 어쩌면 삶의 법칙이고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날은 미국에서 바다낚시를 한 첫 경험으로 충분했다. 남편과 아이들이 낚싯대를 잡아보고 갯지렁이를 낚싯바늘에 꿰고 찌를 던져보고 닐을 감아 보고 밑밥으로 새우를 던져주는 경험을 대서양에서 했다는 것이 감격스러운 것이다. 바다의 비릿한 냄새가 지금도 느껴지는 것 같다. 큰아들은 작은 물고기를 낚아 손맛을 보았다고 평생 가슴에 새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란 대학생 큰아들은 늘 낚싯대를 들고 친구들과 나간다.
실망하기는 이르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자 흥미를 잃은 아이들은 얕은 해수욕장에 기어 다니는 게를 쫓았다.
미국사람들은 네모난 철망 안에 생닭다리를 넣고 기다란 줄을 매서 멀리서 기다리고 있었다. 먹이에 유인된 게들이 저절로 철망 안으로 들어가 잡혔다. 사이즈가 작아서 먹을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이 너무너무 재밌어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사촌오빠가 나섰다. 오빠는 생 삼겹살을 긴 끈에 묶어서 게들을 유인했다. 게가 다가오면 뜰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 게를 잡는 작전이었다. 게는 생각보다 빨랐다. 아이들은 신기해서 소리를 지르며 야단법석이다. 도망가는 게들을 오빠는 잽싸게 잡으려 했고 게들은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미국 동부 볼티모어와 그 일대 해변은 다리가 푸른 블루크랩이 유명하다. 먼바다로 나가 잡아온 커다란 게들을 올드베이 양념을 뿌려 찜기에 찐다. 레스토랑에서는 테이블에 종이를 깔고 올드베이 시즈닝을 듬뿍 바른 블루크랩을 그대로 낸다. 그러면 나무망치로 딱딱한 게 껍데기를 깨서 부드러운 속살을 쏙쏙 파먹는 것이다. 나무망치로 깨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기에 모이또 한잔 곁들이면 그만이다.
바로 그 블루크랩이다. 한다면 하는 사촌오빠는 어른 키만큼 깊은 곳으로 가서 제법 큰 사이즈의 게를 진짜 잡아왔다. 집념의 사나이 덕분에 우린 게 맛을 봤다.
이후에도 만반의 준비를 해 블루크랩을 잡으러 여러 번 바다로 갔다. 또, 게 철이 되면 밤에 게들이 스스로 바다 위에 동동 떠오른다. 대서양 근처 다리 위에서 기다란 뜰채를 들고 기다렸다가 둥둥 떠 있는 블루크랩을 그냥 떠 올리기만 하면 된단다. 이것은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달밤에 체조하듯 아주 쉽게 그냥 떠오른 게를 들고 오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첫 캠핑을 너무나 즐겁게 마치고..... 그다음 해 휴가 때, 킵토피크 주립공원에 다시 가기로 했다.
일 년을 기다렸던 여행이었다.
아침부터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출발 직전, 허리케인이 우리 주 옆을 지나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느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안전 때문에 캠핑을 취소하자고 했다. 그러나 두 명의 성인, 남편과 사촌오빠가 며칠을 벼르고 벼른 여행이라며 포기할 수 없다고 우겼다. 그곳은 허리케인의 직접적인 영향권은 아니라면서. 그들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보통 이런 날, 미국에서는 모든 행사들을 취소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그저 용감했다......)
TV 긴급속보는 허리케인이 꽤 위협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떠난 뒤였다. 이때 캠핑을 떠나는 것은 정말 미친 짓이다. 그러나 무모하게도 몇 시간 후, 우리는 진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로 와이퍼는 정신없이 움직였지만, 앞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무섭고 덜컥 겁이 났다. 무모한 남자들! 이미 우린 커다란 허리케인 영향권 안에 있었다.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렇게 두세 시간을 넘게 달렸던 것 같다.
그런데, 웬일이지? 킵토피크에 가까울수록 날씨가 맑게 개고 구름 한 점이 없다. 청명한 하늘과 상쾌한 바다 냄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럴 수도 있는 건가? 땅덩어리가 워낙 크다 보니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린 새로 산 10인용 텐트를 짓고 신나게 대서양으로 풍덩 몸을 던졌다. 눈부시고 맑게 빛나는 햇살아래에 구겨진 마음과 몸을 활짝 펼치고 누웠다. 아이들은 모래성을 만드느라 분주했고 하하 호호 웃었다. 그리고 낚싯대를 메고 물고기를 낚았으며 바다 밑을 기어 다니는 게들을 쫓았다. 사촌오빠 표 소갈비를 다 같이 뜯었다.
우주 같이 까만 밤에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반짝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온 마음을 적셨다. 포근했고 따뜻했다. 하얀 마시멜로우가 노릇하게 구워지고 달콤한 향이 날았다. 아이들 입속마다 마시멜로우가 사르르 녹아드는 것이 꼭 부드러운 달빛을 먹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의 편안한 일상을 뒤로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따라나선 유학길에서 버둥거리던 시절이었다. 모닥불 앞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보면서 견뎠다. 그리운 모국어와 한국의 맛이 그리워질 때마다 장작 타는 소리와 냄새, 캠핑을 한 번씩 찍어 먹으며 향수를 달랬다. 그러고 나면 힘이 났다. 하루하루를 힘차게 살아갈 힘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왔다.
한국으로 돌아와 삶의 여유도 없이 회사 일에 내달리는 남편을 볼 때면 짠하다. 남편은 잘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있다. 인생의 전성기에 들어서 해야할 일들이 많은가 보다. 텅 빈 집과 소원해지는 관계와 흘러가는 시간이 아쉽기만 할 때, 한 번씩 그것들을 생각한다. 대서양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과 비릿하고 시원한 바다 냄새, 그리고 추억의 바람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