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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 용미 Jul 03. 2024

결코 평범하지 않은 미국 생존기

12. 공짜 뉴욕 여행 1

    유학길에 나선 지 2년이 넘었지만 캠핑 말고 여행다운 ‘여행’은 꿈도 못 꿨다.   

   

   어느 날, 남편 실험실에 새로운 동료가 왔다. 뉴욕에서 메릴랜드 대학교로 옮겨온 그녀는  계약기간이 남은 뉴저지 아파트가 비어 있다며 우리에게 공짜로 빌려 주겠다고 했단다. 우린 기꺼이 제안에 응하며 여행을 가겠다고 했다. 그때가 2012년 11월 추수감사절 연휴를 며칠 앞둔 때였다. 


  아파트라니 잘 됐다. 음식을 해 먹을 수 있겠다 싶어 나는 바리바리 음식부터 준비했다. 어디 어디를 가고 야경으로는 어디가 좋은지, 나름 동선을 고려한 하루하루의 계획을 세웠다. 여행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설레고 가슴 벅차오르게 했다.   

    

  빈 집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집에서 침대로 사용하는 도톰한 매트와 침낭, 전기밥솥, 냄비, 프라이팬, 코펠용 식기, 수저까지 다 챙겼다.  짐이 산더미 같고 거의 이사 수준이었다. 차 트렁크를 가득 채우고 아이들이 탄 좌석 통로 사이사이에 아이스박스와  먹을 물을 끼워 넣었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짐을 실었다. 

  아이들은 뉴욕에 간다는 말에 그저 신나 있었다. 우리는 하루라도 아끼고 싶어 남편 학교가 끝나자마자, 그날 밤에 떠났다.


  처음으로 4박 5일, 뉴욕 여행을 떠났다.      


  메릴랜드에서 뉴저지까지 거의 다섯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출발했더니 자정이 다되어 도착했다. 짐이 너무 많은 데, 아파트는 다행히 1층이었다. 아이들은 비몽사몽인데도 짐을 하나씩 들고 날라야 했다. 연신 하품을 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얼른 씻기고 재워야지,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남편이 앞장서서 들어간 아파트의 상태가 엉망이었다. 이사를 나간 아파트는 텅 빈 공간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아니었다. 급하게 도망이라도 친 것처럼 아파트내부는 그야말로 쓰레기로 가득했고 서 있을 공간이 없었다. 여행이라는 희망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꺼져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얼음이 되어 꼼짝 못 했다. 

   그래도 남편은 예상하지 못한 현실 앞에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혼자서 조용히 안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매트를 깔고 아이들을 먼저 눕혔다. 그제야 나도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 옷을 갈아입히고 잠자리를 봐주었다. 


   “매트 밖으로 나오면 안 돼. 얼른 자~아.”

  늘 그렇듯 남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다정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러고는 가져온 침낭으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무슨 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 남편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화장실 청소도 하고 쓰레기들을 밖으로 내놓았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가져온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고 그릇들을 정리했다. 우리 둘이 부지런히 움직였더니 제법 깨끗한 티가 났다. 황량한 초원쯤은 돼 보였다. 우리도 매트에 누웠다.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옆에서 자는 남편을 보면서 조금 안쓰러웠을 뿐이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을 뿐, 누구의 잘못은 없었다. (아파트를 내어 준 그녀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우린 뉴욕 캠핑을 왔다고. 전용화장실이 가까이에 있고 수도도 가까이에 있어 너무 편리한 캠핑이라고. 텐트는 넓고 춥지도 않으니 너무나 아늑한 곳이라고. 빨강머리 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긍정적으로 생각했듯, 나도 빨강머리 앤이 되어 보기로 했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뉴저지다. 뉴욕까지 한 시간 거리에 있다. 스스로를 토닥였고, 곤히 잠든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을 보며 내일의 여행만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날, 전기밥솥에서 밥이 되어가는 소리로 아침이 요란했다. 나는 도시락을 싸느라 새벽부터 분주했다. 아침은 먹고 출발, 점심은 도시락으로, 저녁은 사 먹기로 했다. 입장료도 내야 하고 물가가 워낙 비싸다는 뉴욕에서 아낄 수 있는 것은 모두 아껴야 했다.     

 

  드디어 뉴욕 맨해튼으로 출발! 우리는 스테이든 아일랜드 선착장으로 가 배를 탔다. 매일 출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라고 했다. 이것도 공짜란다. 우리는 배 위에서 뉴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을 봤다. 횃불을 들고 있는 멋진 여신을 아주 멀리서 그냥 그렇게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첫날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가기로 했기 때문에 자유의 여신상은 그렇게 스킵하기로 한 것이다. (나중에 한국에서 온 언니랑 조카를 데리고 두 번째 뉴욕여행을 갔다. 우리는 리버티 섬으로 가서 자유의 여신상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뉴욕 지하철은 소문대로 조금 지저분했다. 그러나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지하철도 신기해서 기념사진을 찍어댔다.     


  우와~ 

  뉴욕 맨해튼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세련된 분위기의 뉴요커들은 좁은 인도를 빠르게 걸었다. 때로는 횡단보도에 빨간색 불이 들어와도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유아차를 몰고 가던 나도 인파에 몰려 빨간불에 지나갔는데, 어린 큰아들에게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비도덕적인 행동을 한 것이라고 두고두고 얘기한다. 낯선 뉴욕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해도 소용없다.  아들은 강박처럼 꼭 파란불에 횡당보도를 건너게 되었다.  

   

  타임스퀘어는 전 세계의 화려한 전광판들이 한 대 모여 저마다의 불빛들로 자신의 상품이나 나라를 자랑한다. 그 눈부신 번화가 한복판에 우리 가족이 서 있었고 웃으며 포즈를 취했고 사진으로 남겼다. 진짜 뉴욕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노란 택시들도 보였고 오픈카처럼 지붕이 없는 2층 관광셔틀도 지나갔다.  에너지 넘치는 젊고 밝고 힙한 분위기가 내 심장을 흔들었다. 


  매년 12월 31일이면 카운트다운을 했던 뉴욕의 한가운데, 바로 그곳에 우리가 있었다. 우리는 빨간 계단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그때는 그 빨간 계단이 그렇게 유명한 줄도 몰랐다.)

     

  높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우리 다섯 명의 얼굴을 한 장의 사진에 넣자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해가 저물기를 기다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멋진 야경을 보기 위해서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은 아침에 본 자유의 여신상 흉내를 냈고 장난을 쳤으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설명을 들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분 만에 86층에서 내렸다. 어마 무시한 높이에 올라와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안전을 위한 철조망들이 쳐져서 밑을 내려다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멀리까지 끝도 없이 펼쳐지는 불야성 같은 불빛과 마천루 빌딩 숲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얼마나 기억할까.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는 벼르고 벼른 저녁을 먹기 위해 코리아타운으로 갔다. 한번 사 먹는 거라 메뉴에 많은 고민을 했다. 거의 몇 바퀴를 돌고 돌아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킨을 먹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아직 맛보지 못한 코리안 스타일의 교촌치킨 맛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 컴컴했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야단이다. 


  그런데 남편의 표정이 별로다. 술과 담배를 하는 사람들과 섞여 가족들이 올만한 곳이 아니라는 거였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나는 한순간에 마음이 상했다. 아마도 나는 꽤 배가 고팠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지만, 나는 그대로 식당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온 가족이 아무 말 없이 지하철을 타고 뉴저지 숙소까지 왔다. 밤 10시가 넘도록 밥도 먹지 못한 어린아이들에게 아침에 한 밥을 먹이고 재웠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남편을 오해했다. 첫 외식에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여행을 괜히 갔다고 생각했다. 어지러웠던 숙소를 보며 속상함이 쌓이고 뉴욕 여성들이 거의 모두 신고 다니던 부츠를 보며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던 내 모습에 화가 났던 것이다.  한 끼 사 먹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남편이 그렇게 생각했을 리 없다. 아끼는 것은 매번 내쪽이었으니까. 


   맞지 않는 남의 옷을 입은 것 마냥 불편했던 마음들이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밀려왔던 것 같다. 그냥 집에 있었으면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고. 

  거기까지 가서 기대했을 아이들에게 한없이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남편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 혼자만의 마음이었다고. 이제 와서 고백해 본다. 하지만, 뉴욕에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걸었던 뉴욕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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