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뿌리를 보고 왔다
여름 한가운데 외할머니가 걸어온다. 잠자리 날개 같은 한복 치마를 두르고 하얀 모시 적삼을 입었다. 반듯한 앞가르마를 타서 쪽을 진 머리에는 은색 비녀가 반짝거린다. 거의 희어진 머리는 동백기름을 발라 반질반질하고 하얀 얼굴에 인자함이 흐르고 정갈한 모습에서는 멋스러움이 묻어난다. 외가에서 보던 외할머니의 모습과 사뭇 다른 고운 얼굴이다.
“와~ 상숙아 좋다. 근데, 남은 음식 이렇게 두면 쉰다.”
다정한 말투로 외할머니가 말씀하신다. 파마머리의 앳된 엄마는 당신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있다. 엄마는 외할머니의 걱정 어린 말씀을 뚝뚝 떨어지는 보석처럼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관심과 사랑이 처음인 것처럼. 아마도 외할머니의 우리 집 방문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바쁘다. 열 명의 자녀를 낳았기 때문이다. 아들 다섯, 딸 다섯. 거의 십 년 동안 배가 불러 있었을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잔인한 일 같기도 하다. 집안 살림과 밭일, 과수원 농사까지 지으며 아이 열을 낳고 키우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그 시대는 그랬단다.
남자들이 한 남자를 눕혀 놓고 발을 때린다. 하얀 소창(천기저귀) 줄로 두 발을 꽁꽁 묶고 잡고 있는 사람, 몽둥이(다듬이)를 들고 발바닥을 때리는 사람, 누워서 발을 쳐들고 맞는 사람, 그에게 뭔가를 묻고 때리라고 지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상한 것은 누구 한 명 말리는 사람이 없고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모두 웃고 있었다는 것이다. 새 신부가 될 이모만이 누워 맞는 남자를 위해 “오빠, 살살 좀 해요!”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낮 마당에서는 떡메 치는 소리가 났고 인절미가 만들어졌다. 지글지글 하루 종일 전을 부쳤으며 한쪽에서는 한과와 타래과를 튀겨내고 있었다. 끓는 물에 경단이 떠오르고 홍어 무침과 홍어탕, 과일 샐러드, 육개장과 겉절이, 고들빼기 등 하루 종일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수많은 음식이 외가 마당에서 만들어졌다.
친척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큰언니 이름은 알아도 셋째인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예식장에서도 어른들은 분주하다. 아이들은 스스로 밥을 찾아 먹어야 했다. 지나가던 셋째 이모가 묻는다.
“니 밥 묵었나?”(부산으로 시집간 이모는 부산 사람이 다 되었다.)
여덟 살 아이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래야지. 언니야, 야는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다.”
셀 수 없는 사람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내 밥은 내가 챙겨 먹었다.
삼촌과 이모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시집 장가를 갔다. 그 식구들이 한번 모이면 어마어마했다. 열 명, 형제들은 남매계를 했다. 아니, 7남매 외할아버지 형제들이 했던 남매계를 자식들이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번에 알았다.
그 모임은 나의 학창 시절 유일한 여행이었다. 우리 아빠는 목수였다. 성실한 아빠는 비가 와야 쉰다. 비가 오는 날에는 여행이고 놀러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니 해마다 엄마의 남매계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여행이 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외가에서 모였다. 멀리 사는 이종사촌들과 만나는 기회였고 나들이였다.
이후 남매계는 집집마다 전국을 돌아가면서 했다. 엄마 형제 열 명과 작은할아버지들 자녀들까지 열다섯 집이 주 멤버라고 한다.(여자 형제, 고모할머니들의 자녀들은 번외 멤버로 참석만 가능하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일 년에 한 번씩 모이니, 15년 만에 한 번만 유사(모임 주체자)가 된다. 적게는 50명, 많으면 70-80명 가까이 모이는 것으로 안다. 외할머니가 오신 그날은 우리 집, 초가를 허물고 양옥을 새로 지었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 집 골목에 건물들이 허물어지고 큰길이 났다. 그 양옥을 허물고 2층 건물을 지었을 때, 다시 우리 집에서 모였다. 같은 동네 사시는 고모할머니네 집과 우리 집에서 그 많은 친척들이 나누어 잠을 잤다. 모든 음식은 다 집에서 만들었다. 우리 외가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했고 문화였는지도 모르겠다. 모이면 무조건 잔치다.
거실 바닥 한쪽에 겨우 누을 자리가 있었다. 화장실 한번 가면 자리가 없어지기도 할 만큼 다닥다닥 붙어 잤다. 그날 금산에 사시는 숙모가 내 옆에서 잤다. 백일쯤 되는 아이를 안고 잠을 재운다. 좁디좁은 그 사이에서 아이는 얼마나 불편했을까. 밤새 낑낑대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를 붙잡고 숙모는 흥얼흥얼 노래하듯 아이를 다독였다. 한 번도 짜증 부리지 않고 한 번도 화내지 않고. 아이를 낳고 수면 부족과 밤중 모유 수유에 시달릴 때, 난 그 숙모를 떠올렸다. 숙모는 아마 천사일지도 모른다고. 친절하고 예쁘게 밤새 아이를 달래는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 그 자체였다.
남매계는 점점 자랐다. 자녀 세대가 시집 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아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회의 끝에 우리 자녀 세대들의 공식 참석이 제한되었다. 모임은 엄마 형제들과 사촌 형제들만으로 한정 지어졌다. 세대가 달라지니 젊은 사람들은 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60대, 70-80대가 단출하게 모여 한 번씩 꽃구경, 바다 구경, 단풍 구경을 다니신다. 얼마나 우애가 좋은지 끼어들 틈이 없다.
몇 년 전, 미국에 사는 장손 오빠네(메릴랜드에서 함께 낚시 다니던, 결평미생 참고) 가족이 온다는 소식에 나도 아이들과 달려갔다. 대둔산 펜션에서 모였는데 ‘남매계 회의’에 처음 들어가게 되었다. 장손이 미국에 나가 있으니 제사를 모셔 가는 일 등 여러 가지 안건들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먹고 노는 단순한 모임인 줄 알았다. 그러나 꽤 조직적이고 체계가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그동안 있었던 변화들과 소식들을 함께 나눈다. 나랑 동갑인 이종사촌네가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신도시로 이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때 함께 놀던 그 얘도 가장 노릇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게 가슴 뭉클했고 뭔가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외삼촌의 아내, 숙모님은 늦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따셨다고 기쁜 소식을 전했다. 당시 거의 60을 바라보는 연세여서 큰 감동을 받았다. 삼촌과 같은 대학 출신의 숙모는 내조를 위해 공부를 중단했을 텐데, 향토 장학금을 받아 끝까지 꿈을 이루신 것에 너무 자랑스럽고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시느라 애를 먹었다고 하는데, 정말 대단하다. 그 숙모님의 이야기가 특히, 아직도 마음에 남는다. 잘 나가는 남편 옆에서 숙모는 얼마나 부러웠을까. 내 감정이 겹친다.
올 4월에 우리 엄마가 유사를 맡았다. 같은 동네 사시는 고모할머니가 연로하셔서 차를 못 타시는데, 남은 형제들과 자녀들을 보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모임은 집에서 하지 않는다. 숙소를 빌려서 한다. 음식도 사 먹고 간식이나 술, 음료 정도만 준비하면 된다. 엄마는 집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음식 메뉴를 결정해 식당을 예약했다. 결정만으로도 고민과 생각이 많아지고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나도 힘을 보탰다. 모든 분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남편 회사에서 연구한 기술을 이전받아 만든 생유산균을 엄마집으로 보내드렸다. 골고루 나누어 드리라고.
“딸, 남매계가 금요일인데 올 수 있어?”
“나는 갈 수 있죠.”
“한서방은?”
“바빠요. 평일이라 가능할까 모르겠어요.”
엄마는 가까이 사는 우리 부부가 와 주기를 은근히 바라셨다. 특히 한서방이.
전국 각지에서 오시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심부름도 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고모할머니네 자녀, 이모와 삼촌, 그 자녀들까지 거의 다 오는데 우리 집 자식도 참석하기를 바라시는 거다. 게다가 번듯한 박사 사위가 와 주면 금상첨화라고 말씀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물어볼게요.”
남편도 나도 여간해서 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연차는 아껴 두었다가 일이 생겼을 때 쓴다. 나는 생각했다. 엄마 연세에 이보다 더 큰일이 무엇일까. 얼마 전, 남편은 친한 동료들과 평일 연차를 쓰고 여행을 다녀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냥 아이 같았고 보기 좋았다. 그래, 우리도 당연히 가야지!
“당신, 다음 주 금요일에 시간 좀 내요! 엄마 집에서 남매계 한 대요. 이럴 때 가서 도와드려야지 언제 도와요. 생전 장인 장모님께 전화도 한 통 안 하면서.”
좀 세게 말했다. 뒷말은 뺄 걸 그랬다.
“알잖아. 우리 엄마, 자기가 가야 더 좋아하잖아. 박사 사위 왔다고. 중요한 일이 있으면 안 되는 거 알아요. 하지만, 가면 좋겠어요.”
미국에서 어렵게 박사학위 받고 돌아왔지만, 현실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월급이 올랐다던가, 회사를 나와 교수가 되었다던가. 오히려 남편은 실력을 인정받아 일만 많이 하고 퇴근 시간만 늦어졌을 뿐이다. 한국에 와서 내내 독박 육아를 떠안았다. 그 박사 학위 이럴 때, 써먹어야지!
“어, 일정 보고 말해줄게.”
남편은 갈 수 있다고 연차를 냈다.
하지만, 결국 오전에 출근해서 4시까지 일하고 오후 늦게 출발했다. 내 고향 유명한 떡갈비 식당으로 바로 달려갔다. 겨우 저녁 시간을 맞췄다. 이미 식사 중이신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차를 못 타시는 고모할머니를 위해 엄마는 근처 한옥 독채를 빌리셨단다. 어릴 적 내가 놀았던 그 골목길에 숙소가 있어 잠시 놀랐다. 남매계 회의에도 참석했다. 자랑스러운 우리 집안 모임의 역사를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 세대, 남매계 공식 모임의 횟수는 2025년 4월에 35회라고 말씀해 주셨다. 1982년 외할아버지, 부모 세대에게 물려받아 시작했으나 코로나 등 사정에 의해 모이지 못하는 해도 있었다고 한다. 와~ 모임의 역사가 이렇게 깊구나. 나도 그 역사를 함께 했다는 것에 울컥하고 찡했다. 순간 남편을 보며 이거 봐, 우리 집안이 이 정도야~ 혼자 으쓱했다.
작년 한 해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외숙모 딸, 나랑 동갑인 ㅇㅇ 딸이 외국 박사 삼촌의 동문으로 H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기쁜 소식을 알린다. 거제도에서 얼마나 공부를 잘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다 뿌듯하다.
그리고 우리 아빠 이야기가 이어진다. 대장암 수술을 이겨낸 사연이다. 의료계 파업으로 수술이 미뤄지고 아빠의 상태는 심각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빠는 할아버지 무덤 앞에서 소주 한 잔을 따르며 울면서 “아버지, 아들 ㅇㅇ 좀 살려 주시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30분 만에 기적처럼 엄마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여보, ㅇㅇ 대학병원에서 수술해 준대요."
역시 조상님들이 도와주시는구나. 대학병원을 쫓아다니며 우리 남편 수술 좀 해달라고 사정사정했던 엄마의 정성을 받아 주셨던 거다.
80이 넘은 나이에 아빠는 수술과 항암을 잘 이겨내셨다. 70대까지 목수로 일하셔서 그런지 체력이 암을 감당해 낸 것이 분명하다. 피를 많이 쏟아 거의 말라버린 체격에 조금씩 살이 오르고 있다. 아빠보다 어린 동서들과 처제들(이모부들과 이모들)이 참 대단하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고 보니 옆에서 간호한 엄마가 더 늙어 있었다.
같은 동네 사시는 고모할머니가 외할아버지 7남매 중에서 막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늘 현명하고 강단 있으신 분이라 땡강쟁이 막내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였다. 무릎 통증으로 걷지 못해도 손주 넷을 모두 키워주신 고모할머니이시다. 남편인 고모할아버지가 대장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병간호도 하셨다.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두 분 다 돌아가셨다. 작은할아버지 두 분도 다 돌아가셨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뿌린 자손들의 역사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막내 고모할머니와 작은 외할머니 한 분과 다른 지역에 사는 고모할머니 한 분만 살아계신다. 일명 이쁜이 할머니는 구십 살이 넘는 나이에도 곱게 화장하고 염색까지 하고 여전히 예쁘고 곱다. 아픈 곳도 없으신지 막내 고모할머니보다 훨씬 건강하고 잘 돌아다니신다. 복돈이라며 100만 원을 찾아와 우리 모두에게 3만 원씩 새 돈을 나누어 주셨다. 나는 운 좋게 두 번 받았다. 부디 이쁜이 고모할머니가 지금처럼 건강하게 오래도록 우리 곁에 계셔주기를 기도했다.
“우리 한 박사 차례여!”
엄마는 호칭을 바꾸어 말씀하셨다. 남편은 정중히 인사하고 우리 결혼식 때 뵙고 참 오랜만에 뵙는다고 입을 열었다. 친척들이 너무 많아 지금도 잘 모르겠다고.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삼촌들이 너무 많아 이름도 헷갈리고 모두 몇 명인 줄도 몰랐다.
“아이고, 우리 용미 신랑 한 박사가 와서 좋고만. 말도 참 잘하고. 내년에 전주에서 할 거니까 꼭 와야 해!”
내년 유사를 맡으신 전주 외숙모가 신신당부를 하신다.
“네, 내년에도 유산균 사 들고 꼭 가겠습니다.”
남편은 약속했다. 이것이 남편과 나의 효도다.
우리 외가 쪽에 박사님도 여럿 있고 교수님도 두 분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사 삼촌을 비롯 많은 분들이 이미 은퇴하셨고 제2, 제3의 직업으로 여전히 일을 즐기신다는 것도 알았다. 대기업을 다니다 사업도 하고 다시 회사에 들어갔다가 지금은 학교 시설관리를 하시는 이모부님, 운전을 기반으로 다양한 직업으로 변경, 여전히 운전 일을 하시는 이모부님, 평생 군인으로 일하시다 전역 후에 경비일도 마다하지 않으신 큰 이모부님, 회사를 다니다 펜션사업, 조명사업도 하셨다가 식당관리도 하셨다가 지금도 여전히 바삐 일하시는 막내 외삼촌... 보건소 소장까지 지내신 금산 고모도 은퇴 후 간호사로 일을 하신단다. 금산에서 삼 농사를 지으시는 삼촌들도, 젊은 한 때 한강 유람선을 몰며 멋진 모습을 보여 주셨던 잘 생긴 삼촌......
모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