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수필 부문 선정작품
이월의 마지막 날, 불광천을 따라 한강변으로 산책을 나섰다.
개천에는 잿빛 옷을 걸치고 꼿꼿한 목으로 그림처럼 서 있는 두루미와 자맥질하는 청둥오리 가족도 볼 수 있었다. 아직 새순을 틔우지 못한 갯버들과 싹을 밀어 올리지 못한 마른풀들도 봄을 기다리고 있다.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바람은 한겨울의 칼바람이 아니었다. 산책길 옆 바싹 마른 풀잎 사이로 청보라색이 엿보였다. 쪼그리고 앉아 살펴보니 앙증맞은 봄까치꽃이다. 푸른빛 꽃잎 넉 장이 가슴을 콩닥콩닥 두들겼다. 이 꽃은 제일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꽃이라서 손님이 오는 것을 알리는 까치처럼 반가운 마음에 봄까치꽃이라고 한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오죽이나 간절했으면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꽃이 지고 난 뒤 씨방 모양이 닮았다고 해서 ‘큰 개불알풀’이라고도 부른다. 옛 어른들의 기발하고 해학적인
이름 짓기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시대를 생각해 보면 어려움 속에서도 얼마나 따듯하고 여유로운 삶을 즐겼는지, 작은 꽃 이름에서도 나타나는 그 마음자리가 늘 재고 동동거리는 나로서는 마냥 부럽다.
봄까치꽃은 무리 지어 피는 것이 특징이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춥고 매서운 한파에 웅크리고 있다가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결에 성급한 한 송이가 먼저 얼굴을 내민 듯했다. 아직 소소리바람이 남아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급한 성질이 나와 비슷한 듯해서 괜한 걱정을 해본다.
봄까치꽃을 만난 이후 하루에도 서너 번은 작은 정원인 베란다에 나갔다. 화분 속의 산작약이 행여 꽃대라도 밀어 올렸을까? 할미꽃과 매발톱꽃도 꽃봉오리를 물었는지 살펴본다. 때로는 창문을 활짝 열고 지나가는 바람과 햇볕과 아파트 뜰의 식물에게도 봄이 어디쯤 왔냐고 말을 걸었다. 나이 많은 은행나무는 아직이라며 눈을 꼭 감고 있고 잔디는 감추어 두었던 연둣빛을 살짝 보이면서 바스스 일어나서 이제 곧 봄이 온다고, 한 발짝 정도 남았다고 한다.
내 인생에서도 수없이 많은 날을 봄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어릴 때 꿈꾸었던 봄은 동화책 속에 나오는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는 것이었지만, 청소년기에는 도서벽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봄을 기다리기만 할 뿐 열심히 찾아 나서지 못했다. 꽃대 하나 올리지 못하고 아른한 아지랑이만 바라보다가 끝이 났다. 그땐 나의 봄을 완성해 줄 햇볕이 부족했고 촉촉한 봄비도 때맞추어 내리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 나의 봄은, 같은 곳을 보고 같은 꿈을 꾸는 남자를 만나서 잘 사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봄도 꽃피고 나비 날다가도 진눈깨비 휘날리고 찬비가 내리기도 하였다. 결혼생활 내내 가족을 위해 삶의 전부를 내놓았다. 남편이 승진하거나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다닐 때 그때가 눈부신 나의 봄인 줄 알고 살았다. 예순을 훌쩍 넘기고 모두 내 곁에서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생각해 보았다. 그 세월이 내 인생의 봄날이었는지. 아니었다. 그때도 나는 봄을 찾느라 겨울의 끝자락에서 늘 아등바등하였음을···.
잠시 젖었던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임을 만나러 가는 마음으로 봄을 사러 가까운 재래시장에 갔다. 물결처럼 넘쳐나는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옷자락 사이로 왁자지껄 봄의 소리가 들린다. 냉이도 쑥도 달래도 난전에 앉아서 서로서로 봄이라고 떠들고 있다. 한 발짝을 기다리지 못하고 비닐하우스 속에서 뛰어나왔을 딸기와 토마토도 서로 봄맛이라고 우기고 있다. 시장을 두리번거리다가 내가 찾던 것을 발견했다. 은은한 향기와 온갖 색으로 배시시 웃으며 발걸음을 붙잡는다.
꽃잎이 벨벳처럼 우아한 진보라색의 바이올렛과 분홍색의 앵초. 잉크 한 방울 톡 떨어뜨렸을 것 같은 신비로운 푸른색의 물망초와 화분에 납작 엎드린 듯한 앙증맞은 야생화까지 골랐다. 웬만한 꽃보다 예쁜 색과 잎을 가진 다육(多肉) 식물도 담고 보니 양손이 봄으로 가득했다. 무거워진 손과는 달리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시장을 벗어나려는데 눈앞에 아장아장 시장 구경 나온 아기가 보인다. 한 손은 엄마 손을 꼭 잡고 다른 손은 구름처럼 몽실한 분홍색 솜사탕을 잡고 있다. 연신 아기에게 눈 맞춤하며 소곤거리는 아기엄마, 기다리는 봄은 참 좋다. 아련히 어린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가면서 솜사탕 한입 베어 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봄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미련이고 꾸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꿈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휭하니 찬 바람 한 줄기 지나간다. 아직은 쌀쌀하다. 그러나 마른 가지에서 봄을 기다리는 여린 생명들은 잘 견뎌내며 제 몫을 다할 것이다. 봄이 한 발 앞에 와있기에···.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수필 부문 선정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