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냇동생은 11월 말경 태어났다. 그날 새벽 엄마의 해산 빨래를 대야에 담아 냇가로 갔다. 해 뜨기 전 시냇물은 살얼음이 얼 정도로 차가웠다. 빨래터에 앉은 나는 행여 누가 볼까 봐 시린 손을 가슴팍에 닦으면서 핏물 가득한 빨래들을 세차게 흔들었다. 붉은 핏물이 흘러가는 물줄기에 섞여 빠르게 사라지길 바랐다. 동생이 생긴 것이 반갑지 않았다. 나에겐 결혼한 친구도 있는데 동생이라니…. 그래도 어쩔 수 없었을 엄마를 이해하려는 생각에 내 마음을 다독였다.
종갓집 장손과 결혼한 엄마는 나를 첫딸로 낳고 이듬해 여동생을 낳았다. 삼촌들은 결혼하자마자 아들을 낳고 기세등등했다. 엄마는 몇 년 후 아들을 낳았지만, 첫 돌 무렵 홍역으로 잃었다. 연달아 여동생도 보내고 말았다. 엄마는 자식을 지키지 못한 게 당신 탓인 듯 아픈 가슴을 감추고 숨죽여 살았다. 장손인 아버지는 아들을 몹시 기다렸지만 나와 아홉 살 터울로 태어난 동생은 또 딸이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동네 아저씨들과 점방에 모여서‘도리짓고땡’을 치며 밤을 지새우기가 부지기수였다. 남편 일탈에 애가 탄 엄마는 나를 앞세웠다.
“아부지예, 엄마가 급한 일이 생겼다고 빨리 오시라….”
“마! 집에 가 있어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아버지가 화투에 미쳤다고 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선물처럼 남동생이 태어났다. 부모님은 그야말로 불면 날아갈까 놓으면 꺼질까 애지중지했다. 그 후 엄마는 보건소에 가서 루프라는 반영구적인 피임을 하고 아버지는 좋아하던 ‘도리짓고땡’을 손에서 놓고 일에 미친 듯 온갖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스물한 살 여름이었다. 집안 감나무 아래 놓인 평상에 힘없이 누워있는 엄마를 보고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더니 “니 동생이 생겼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어떻게 엄마를 대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주저주저하면서 장황하게 시작한 이야기는 이랬던 거 같다.
‘루프를 한 상태고 사십이 넘었으니 생리가 없어도 이젠 끝났구나, 생각했다. 입덧을 해본 적 없으니 그 특권도 몰랐다. 태동을 느끼고 이상해서 보건소엘 갔더니 임신이라고…. 의사는 수술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거절했다. 이 나이에 남사스러워서 어쩌냐?’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엄마가 민망해하지 않게 위로의 말을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의 해산을 내가 도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산부인과는 고사하고 조산원도 가까운 곳에 없고 교통도 열악한 시절이었다.
막냇동생은 건강한 남자아이였다. 엄마는 사십 넘은 노산이었지만, 일주일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두 남동생을 챙기느라 농사를 짓느라 딸들은 뒷전이었다. 되려 내가 틈나는 대로 막내의 엄마 노릇을 해야 했다. 노래 가사처럼 ‘옥아! 옥아! 정옥아.’ 불러 대던 엄마였다.
엄마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해방되기 전까지 일본에 살아서 친구 엄마들과 달리 일어도 했고 한글도 익혀서 그 시절 시골 사람치고는 눈이 밝았다. 그렇지만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고 아들 둘을 낳고는 매우 좋아했다. 친척들 앞에서도 여유롭고 당당해 보였다. 하지만 늦둥이 남동생들은 순둥순둥 효자로 자라지는 않았다. 키우느라 아마도 오장 육부가 다 내려앉았을 것이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들이 뭐라고, 남편이 잘못하면 따지면서 싸우겠다고, 그래도 안 되면 당당히 집을 나가겠다고 엄마 앞에서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결혼해서 딸 둘을 낳았다. 딸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남편은 직원이 아들 안 낳을 거냐고 물어본다면서 비겁하게도 자기 생각이 아닌 척 나를 떠봤다. 내가 아들에 대해 갈등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엄마 생각이 났다.
“내가 만약에 늦둥이 아들을 낳으면 파이(사랑)를 똑같이 세 조각으로 나누지 않고 아들에게 절반 이상 줄 것 같다. 딸들에게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라.” 남편에게 단호하게 한 그 말은 나에게도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나는 엄마와 다르게 사는 줄 알았는데 엄마와 비슷하게 살고 있었다. 독립적으로 잘 키웠다고 생각한 딸들을 아직도 걱정하며 간섭하는 나를 본다. 남편과 싸웠을 때도 집을 나가지 못했다. 자식 핑계를 대면서 그냥 같이 살았다.
매일 매일 늙어가면서 내 나이 때의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만큼 늙지 않았다면 홀로 계신 엄마가 한밤중에 왜 전화했는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일흔의 엄마가 마흔 넘은 자식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여든이 되어야 또 여든의 엄마를 공감할 수 있겠지. 내가 아흔까지 산다면 그땐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 아흔의 엄마를 생각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요즘은 딸과 나, 엄마의 관계를 자주 생각한다. 다 큰 자식이 입바른 소리라도 하면 섭섭하고 야속해서 나쁜 것들이라고 중얼거리며 속앓이한다. 딸들의 언어가 엄마를 향하던 나의 언어와 비슷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냥 엄마니까 엄마한테는 아무 말이나 거르지 않고 해서 마음 아프게 한 것 같다. 그때 엄마를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지만, 지금 엄마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내가 딸인지도 모른다. 엄마의 세상이 된 요양원의 한 평 침대에서, 마음속 깊이 묻어둔 못다 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끝없이 중얼거린다.
볕 좋은 날, 고향 집 빨랫줄에 엄마의 옷가지를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고 대청마루에 엄마와 마주 앉아 남아 있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실천할 수 없는 생각일 뿐이다.
자식을 위해 인생을 소진한 엄마가 망각의 노년을 보내는 것이 너무 아리다. 엄마의 삶을 보면서 나는 저물어가는 인생이지만, 더 늦기 전에 요즘 유행하는 말로‘갓생’을 살아볼 참이다. 나를 돌아보고 숨겨진 진가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나만의 갓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