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골목 어귀를 지나 우리 집 대문이 가까워지면 복실이가 ‘멍멍’하며 꼬리를 흔들고 문밖으로 뛰어나왔다. 내 발걸음과 목소리를 알아듣는 복실이는 누런색 털을 가진 제법 큰 개였지만 나에겐 강아지였다.
그날은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고 대문을 꽝 차고 들어가도 나를 반기며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가 반겨주는 엄마 얼굴을 향해 “복실이는?” 하고 물었다. 엄마는 대답 대신 대야에 남은 빨래를 탁탁 소리 나게 털어서 바지랑대가 받치고 있는 빨랫줄에 천천히 널었다. 그리곤 한 참 뜸을 들인 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 마음을 달래려고 긴 설명을 했다.
“우리 집 개가 잘 생겼대. 아주 부잣집에서 복실이 같은 개 한 마리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며칠 동안 자꾸 찾아와 졸라서…. 더 예쁜 강아지 한 마리 사줄게.”
눈물이 왈칵 났다. 며칠 전부터 동네를 돌아다니며 “개 팔아, 고양이 산다.” 하고 외치던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팔다리가 단단해 보이던 아저씨한테 복실이를 팔았다고 한다. 부잣집은 거짓말일 것이다. 틀림없이 여름만 되면 냇가에서 서너 명의 어른들이 불을 피워놓고 강아지를 죽여 털을 태우던 것처럼 우리 복실이도 그렇게 당할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계란찜을 했다면서 둥그런 양은 상에다 저녁밥을 차려서 마루로 갖고 오셨다. 수돗가에 있는 텅 빈 복실이 밥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이 자꾸만 나고 목이 메어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키우던 닭도 잡아먹는데 개 판 걸 갖고 뭘 자꾸 우노.”
하면서 나를 더 달래지도 않고 밥을 먹는 엄마도 야속했다.
밤에 자려고 해도 복실이 생각이 자꾸 났다. 대문 밖에서 끙끙대면서 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아서 나가 보았지만, 강아지가 있을 리 만무했다. 며칠을 그렇게 지내다가 ‘부잣집에서 잘 먹고살겠지.’ 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 후 열흘도 더 지난 어느 날 학교 갔다 오는데 골목길 들어서 우리 집이 가까워지자 ‘멍멍멍’ 틀림없는 복실이 소리가 들렸다. 내가 대문을 쾅하고 열고 들어서니 홀쭉하니 마르고 다리를 약간 절뚝거리는 복실이가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것이 아닌가.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며 엄마도 개 밥그릇에 먹을 것을 가득 담았다.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난 복실이를 끌어안고 비비고 쓰다듬고 눈물을 찔끔거렸다.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다리를 절뚝이며 이렇게 삐쩍 말랐을까? 엄마한테 이제 절대로 강아지를 팔지 말라고 다짐을 했었다. 내가 학교에 가면 강아지가 또 없어질까 봐 자꾸만 불안했었다. 그리고 3일째 되던 날 학교를 마치고 복실아! 하고 집으로 들어섰는데 복실이가 없었다.
복실이는 우리 동네에서 200리쯤은 떨어진 잘 사는 집에 팔려 갔는데 그 집 사람들은 복실이가 맘에 들어서 살뜰히 보살폈다. 그런데도 통 밥을 먹지 않고 시들거렸다. 불쌍해서 맘껏 뛰놀기라도 하라고 매어둔 목줄을 풀어줬더니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 동네 일대를 다 찾아도 없어서 혹시나 하고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와 본 것이라고 했다.
“거참 영리한 개일세, 분명히 차에 싣고 갔는데 길을 어떻게 알고 그 먼 길을 찾아왔을까?”
하면서 개장수가 다시 복실이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몹시 마음 아프지만 한번 팔았으니 다시 보내야 했다고 하는 엄마가 너무 미워서 보기 싫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복실이와 영영 헤어졌다. 나로서는 무척 힘들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며칠을 복실이가 생각나서 하얗게 밤잠을 설쳤고 결국 앓아누워서 학교도 못 갔다. 1960년대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격은 아픈 이별이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이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게 된 사건이었다.
그 후로 나는 한 번도 개를 키운 적이 없고 어떤 개도 안아 준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개를 아주 싫어하는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