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가 내려앉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묵직한 통증이 목덜미를 타고 오른쪽 머리 중앙까지 올라왔다. 가끔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더 심했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 손가락 끝으로 머리를 두드리고 주먹으로 어깨를 통통 쳐본다. 미련하게 버티다가 결국은 파스를 붙이고 진통제 한 알을 먹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요즘엔 컴퓨터 자판 한 줄도 두들기지 않고 빈둥거렸는데 하필이면 오른쪽이냐고 투덜거리면서 한의원에 갔다. 의사는 목 근육이 이상을 일으켜서 머리와 어깨에 통증을 가했다고 한다. 휴대전화를 많이 본 것이 한몫한 것 같다. 사흘을 치료하고 나니 통증은 좀 나아졌지만, 여진처럼 어깻죽지를 찌르는 듯한 아픔이 남아있다. 오래전부터 간헐적으로 괴롭히던 어깨통증쯤은 병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파스 한두 장 붙이고는 버텼다. 더 아우성을 치면 한의원에 가서 날카롭기 그지없는 수 십 대의 침을 맞고, 피를 보고야 마는 부항으로 입막음했다. 그러면 숙지 막 해졌다.
어깨는 내 몸에서 지분을 갖고 있지만 그다지 소중한 명당이란 생각이 없었다. 그냥 팔과 몸을 연결해 주는 등판의 위쪽이고 목과도 이어져 있는 몸의 한 부분이었다. 어깨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얼굴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씻고 거울을 본다. 약간의 잡티나 뾰루지만 생겨도 화장품 때문인가, 햇볕 때문인가 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것들이 통증을 유발하지 않아도 단지 타인으로부터 맨 먼저 시선을 받고 나를 알리는 첫 간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이유에서다. 심지어 몸체의 제일 끝자락에서 남 앞에 보여줄 일 없는 약지 발가락도 저녁마다 씻어주고 보호제를 바른다. 발가락 끝의 발톱에도 가끔은 꽃물을 들이거나 페디큐어를 해서 멋을 내는데, 어깨에 대해선 그저 내 몸의 두렁인 양 여기고 무관심했다. 우리 몸의 부분들이 정서적으로도 제각각 중요한 일을 하듯이 어깨도 마음을 담아 머리를 기대면 포근한 안식처가 되고 가만히 있는 것으로도 단단한 버팀목이 된다. 몸과 마음을 지탱해 주는 큰 위치에 있었는데 자각하지 못하고 심한 통증이 없으면 발가락의 때만큼도 살펴보지 않았다.
‘어깨’ 하면 많은 구절이 떠오르지만 ‘어깨에 기대다.’란 숙어가 먼저 떠오른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자주 어깨에 올려서 얼러주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의 삶이 버거워질 때마다 기대게 해 주셨다. 나는 아버지 어깨에서 목말을 타면서 떨어질까? 무섭던 긴장감과 하늘과 더 가까워졌다는 만족감, 성취감 등을 함께 느꼈다. 아버지는 언제나 어리광 부릴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단단한 어깨였다.
나도 아이와 손주가 어릴 때 목말을 자주 태웠다. 목말에서 말의 역할은 실상은 목이 아니라 어깨다. 내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아이를 어깨에 올리고 팔을 위로 뻗어 올려 아이의 손을 잡고 힘주어 일어서면 아이를 단단히 받쳐주는 것은 어깨였다. 그럴 때 아이들은 높은 곳에 있는 자신에 대해 약간 긴장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아이 무게를 더 이상 어깨가 감당하지 못할 때까지 수시로 해주던 놀이였다. 어쩜 맛문한 어깨는 생각지 않고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으로 더 행복했던 것 같다. 아버지로부터 느꼈던 그 느낌을 내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언제든지 기댈 수 있게 해 주던 튼튼한 아버지의 어깨는 세월의 흐름 따라 바스락바스락 내려앉더니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은 맞대거나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있다. 비록 병원에서 숨만 쉬고 있는 엄마도 모난 내 마음이 이곳저곳에서 날아온 파편에 맞아서 아플 때 나를 반추하며 기댈 수 있는 커다란 어깨다. 자식과 형제와도 서로의 어깨를 맞대며 버팀이 되고 있지만 내가 기댈 때가 더 많다.
피붙이만 어깨를 내주는 것은 아니다. 젊은 날 내 울음이 파도 소리보다 크게 꺼이꺼이 목구멍을 뚫고 나오던 날, 광안리 밤 바닷가에서 쓴 소주를 함께 마셔주던 친구가 있었다. 각별하던 그 친구와 어느 때 별것도 아닌 사소한 언행에 서로가 마음을 다쳐서 소원해졌다. 틈이 약간 생기니 메꾸기가 어려웠다. 그날 광안리 밤바다에 함께 있었던 것만으로도 그녀를 잃을 수가 없었다. 차깔한 마음을 열고 먼저 연락했다. 조금 더디긴 했어도 그녀도 벌어진 틈을 메우며 예전처럼 서로 어깨를 기댈 수 있게 마음을 열었다.
아이들이 목말을 탈 때 기꺼이 내주고 때로는 매달려서 칭얼거릴 때 자장가를 대신해주던 내 어깨도 이제 많이 지쳤나 보다. 수시로 떼를 부리고 아우성을 친다. 어깨의 통증이 어찌 휴대전화 같은 문명의 이기에 딸려 나간 목 때문만이겠는가. 그도 세월 앞에 사위어 가는 유한의 몸뚱이가 아닌가. 한때 자식들의 영광이 나의 영광인 양 으쓱으쓱하며 조금만 기분이 좋아도 우쭐대던 어깨엔 파스 자국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동그란 피멍이 부항 자국으로 남아있다. 무너져 내릴지언정 고개 숙이지 않던 빠당빠당하던 내 어깨가 조금씩 수그러지고 있다. 온갖 무거운 짐을 올려도 끄떡도 안 하던 그를 오랫동안 홀대한 것이 미안하다.
그동안 꼿꼿이 세워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내 인생을 매달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햇볕 쬐며 봄바람에 꽃내음 맞게는 못해 줄지라도 따뜻한 물로 멍든 생채기 쓰다듬고 향기 좋은 로션이라도 듬뿍 발라서 살살 달래주어야겠다. 소중한 그가 더 아프면, 두려워서 가지 못했던 큰 병원으로 가보고 남은 여정을 토닥거리며 같이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