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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꽃물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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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옥 Aug 23. 2024

한지에 피는 꽃

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수필 부문 선정작품

      한지에 피는 꽃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가끔 미술관이나 국립박물관에서 유명 전시회가 열리면 한 번씩 가 본다. 그림을 보면서 내 마음을 읽어 보려 함이다. 그림을 볼 때 느끼는 감정으로 나를 찾아보기도 하고 돌아보기도 한다.

  우연히 들른 지인 사무실에서 민화 모란도를 보고 마음을 뺏겨서 그가 다니는 화실에 따라갔다. 그곳에 있는 화려하고 웅장한, 그러면서도 섬세하며 우아한 그림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민화는 최소한의 색을 사용한 익살스럽고 회화적인 그림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날 민화의 다른 세계를 본 듯했다. 익숙한 소재와 표현 방법 때문인지 민화는 고향 냄새가 나는 듯하고 고향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나도 한점 그려보고 싶어 바로 수강 신청을 했다.     

  화실에서 배우는 민화의 기본 수업은 먼저 본 위에 한지를 놓고 따라 그리는 초선 따기부터 시작해서 바탕을 칠하고 여러 색을 입히는 바림과 역바림을 한다. 그런 후 초선 위에 한 번 더 선을 그리는 덧선 따기로 마무리하는 과정이다.

  여러 종류의 본에서 나는 연화도(蓮花圖)를 선택했다. 연은 진흙 속에서도 맑고 향기 나는 꽃을 피우고, 꽃이 피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에서 불가에서는 귀히 여기는 꽃이다. 그런 연꽃을 나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처음 해 보는 초선 따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손에 쥔 붓은 직선이든 곡선이든 본을 따라가지 않고 마음대로 새로운 선을 그려 댔다. 선을 딸 때는 날렵하고 가늘어야 하는데 내가 본뜬 것은 삶은 국수 면발 같았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기초를 가볍게 여기고 연습을 생략한 수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색칠을 위해 하얀 사기 종지에 분채를 담고 아교를 한두 방울 떨어뜨려 잘 으깨어줬다. 그리고 물감과 물, 먹물을 넣어 원하는 색을 만들었다. 분채는 색이 맑고 고와서 특유의 화사함이 있었다. 두세 가지 색이 어울렸을 때는 그 색이 아름답고 오묘해서 가슴이 설렜다. 적절한 꾸밈말이 문장을 빛나게 하는 것처럼 색 섞기도 농도에 따라서 그림을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었다.

  융을 깔고 초선 따 놓은 한지를 올려놓고 색칠했다. 바탕칠은 과감한 붓질이 필요한데, 망칠까 싶어서 긴장하고 더듬거리다 보니 매끄럽게 발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색을 입히고 나니 밋밋한 선으로 테두리만 보이던 연이 제법 자태 고운 모습으로 변했다. 겨우 기본 칠을 하고선 내가 무슨 화가나 된 듯이 뿌듯했다.

  민화의 묘미는 바림과 덧칠에 있는 듯했다. 흙탕물에서 꽃을 보호하는 듯한 당당한 연잎을 위해 여러 가지 초록색을 섞어서 바림했다. 진흙탕 바닥에 힘을 주고 서 있는 초록의 연잎이 있어 연꽃이 더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연꽃을 바림할 때는 우아한 분홍색을 표현하기 위해서 꽃분홍과 하양을 잘 섞어 붓질에 정성을 다했다. 몇 번의 덧칠로 색이 더 곱게 살아났다.

  이제 역바림과 덧선 따기만 하면 연화도가 마무리된다. 역바림은 반대 방향으로 바림하는 것이다. 지금껏 꽃잎 안쪽에서 끝 쪽으로 칠했다면 이제는 끝에서 안쪽으로 칠해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색 섞임으로 더 고운 색을 낼 수 있다. 정신을 집중하고 지금과는 반대 방향으로 조심스레 붓끝을 움직여 색을 펼쳤다. 역바림까지 하고 나니 꽃잎이 한층 더 화사해졌다.

  실수한 붓질은 덧칠과 역바림으로 감추어지고 어우러져 표가 나질 않았다. 한지라는 연못 위에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난 듯하다.      

  역바림을 하면서 민화를 그리는 과정이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 가는 삶의 이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민화가 그려지는 과정을 생각해 보았다. 한지처럼 바탕이 되어 준 부모 품에서 초선을 따고 기본색은 칠했지만, 둘러보니 더 나은 분채와 붓으로 바림을 잘한 사람들이 보였다. 바라만 보고 부러워할 수만 없었다. 용기를 내서 기본 칠 위에 물감과 거친 붓으로 나 스스로 바림해 나갔다. 한 번의 바림으로 원하는 색을 낼 수 없었기에 욕망과 기회가 생길 때마다 덧칠하고 또 덧칠하며 살았다.

  잘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춘기의 내 아이들은 무슨 그림을 그려야 할지 생각도 못 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책가방 안에는 만화책만 들어 있고 독서실이 아닌 피시방을 다니고 운동화 대신 하이힐을 숨겨 두고 신고 다니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들은 색의 농담을 위한 먹물 한 방울이 아닌 바탕지를 적셔 낼 검은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내 가슴은 큰 실수를 했을 때처럼 쿵쾅거리고 아팠다.

  다시 마음을 비우고 온갖 색을 섞어 보면서 바림을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독서실 가서 공부하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타협과 당근을 섞어서 역바림 했다. 나의 역바림은 아픈 얼룩도 함께 바림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모두 제 길로 갔는데 나는 아직도 역바림으로 삶을 덧칠한다.      

  삶처럼 그림도 어느 것 하나라도 대충 할 수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힘 조절하면서 꽃잎을 터치하는 순간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로지 내 손끝에서 붓의 힘으로 연꽃이 생명을 얻는 순간일 뿐, 그 순간의 마음은 순수한 백지 같아야 했다. 더 예쁘게 칠해야지 하고 마음에 욕심이 들어가면 한지 위에 있는 붓이 철없는 아이처럼 제 맘대로 날뛰고 떼를 썼다.

  원하는 색을 만들기 위해선 종지에 남아 있는 색을 깨끗이 닦아 내고 새로운 색을 잘 섞어야 했다. 미숙한 붓질로 얼룩이 조금 생겨도 정성으로 바림하면 얼룩이 사라진 꽃송이를 그려 낼 수도 있었다. 마음이 바빠도 순리대로 하고 집중해야 함을 다시 새겨 보는 민화 배우기였다.

  내 연화도는 아직 덧선 따기가 남아 있다. 민화의 화룡점정인 덧선을 따고 나면 한지 위에 핀 연꽃에서 향기가 날지도…….


 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수필 부문 선정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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