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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옥 Jan 07. 2024

아버지의 집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시골집에 물이 샙니다. 보수를 하든지 새로 짓든지 해야겠어요.”라며 남동생이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을 몇 년째 여름마다 보수를 했는데 또 비가 새다니….

  아무도 답이 없으니 한참 뜸을 들인 뒤 한마디 더 한다.

  “팔든지.”

  마지막 세 글자가 맏딸인 내 가슴에 쾅하고 박힌다.

  그 집은 아버지의 혼이 담긴 집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넓은 마당에 감나무 세 그루가 있는 초가였다. 아버지가 쌓은 돌담이 집과 골목의 경계선이 되었고 여름이면 돌담 아래 화단에서 맨드라미와 봉숭아가 삐죽하니 줄을 서서 꽃을 피웠다.

  검은 가마솥이 걸려있는 부엌은 생솔가지 불에 그을린 듯 천장과 벽면이 새까맣고 마루에서 보이는 서까래도 검었다. 가끔은 그 천장 서까래를 타고 허연 구렁이가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구렁이는 때론 부엌 옆에 있는 장독대에서 똬리를 틀고 있기도 했다. 장독대의 항아리들은 틈만 나면 행주를 들고 닦아대는 엄마 손길에 반질반질 윤이 났다. 뚜껑을 열어보면 된장, 간장, 고추장도 있었지만 보관함처럼 온갖 잡곡들도 들어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은 소나기 내리면 열어둔 장독 뚜껑을 황급히 닫는 꿈을 꾼다. 들일 나간 엄마가 장독에 물 들어가면 일 년 장맛을 망친다고 잊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가옥들은 거의 초가였는데 볏짚이엉인 지붕들은 여름이면 짙은 회갈색으로 변해서 우중충했지만, 초겨울에 새 짚으로 이엉을 이어주면 황금색으로 온 동네가 환했다.

  추수가 완전히 끝난 늦가을 밤 아버지는 채가 긴 볏짚을 잘 간추리고 물을 뿌려서 방으로 가져왔다. 윗목에 앉아서 서너 대의 짚을 양손에 쥐고서 손을 마주 비비며 새끼를 꼬았다. 짚에 물기가 마르면 손에다 ‘퉤퉤’ 침을 뱉어가면서 밤늦도록 꼬았다. 낮에는 마당 구석에서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볏짚을 한 움큼씩 쥐고 뿌리 쪽 부분을 사슬처럼 엮어서 이엉을 만들었다. 며칠 동안 만든 이엉을 둘둘 말아 세워두고는 마지막으로 용마루를 덮을 용마름도 엮었다. 용마름은 가운데가 솟아오르고 양옆이 경사져서 빗물이 잘 흘러내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용마름을 엮을 때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한 움큼 쥔 짚의 뿌리 쪽을 엇갈리게 걸어서 힘껏 당겨주고 용마름의 날개 모양을 (볏짚에서 낱알을 털어낸 쪽) 밟아가며 단단하게 엮었다. 용마름의 솟아오른 부분이 숱 많은 머리를 잘 땋은 것처럼 예쁘고 멋져 보였다.

  우리 집에 새로 이엉을 이는 날은 앞집아저씨와 친척 아재들이 와서 함께 손을 맞추었다. 낡고 삭은 이엉을 걷어내면 굼벵이가 썩은 이엉과 함께 툭툭 떨어졌다. 새 이엉은 지붕의 아래쪽부터 빙 둘러주었다. 윗단은 이엉 사이로 비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아래 단과 일정 부분이 포개지도록 했다. 지붕 꼭대기까지 이엉을 다 두르고 나면 마지막으로 용마름을 얹고 새끼줄로 고정해서 마무리했다. 이날은 잘 익은 햇볕도 노란 새 지붕을 더 빛나게 하고 마당 구석구석에 온기를 주며 곧 겨울을 맞을 사람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었다.


  어느 날 보니 우리 집이 기와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억의 부재가 참 잔인해서 기와집으로 바뀐 시점과 과정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들은 말로는 윗마을에 목재 좋은 집이 나왔는데 아버지가 그 집을 사서 해체한 다음 목재만 가져와 초가의 맞은편에 지금의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원래 기거하던 초가집은 헐고 농기구와 잡동사니를 넣어둘 수 있는 슬레이트를 얹은 아래채를 지었다.

  목수의 손을 빌렸겠지만, 목재 좋은 집을 사서 당신 터전에 새로 앉힌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어느 것 하나 당신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이다. 주춧돌을 놓고 집의 뼈대를 세운 뒤 상량을 하고 서까래 위에 흙을 올려서 기와를 한 장 한 장 얹을 때, 이엉을 이을 때와는 또 다른 뿌듯함을 느꼈으리라. 황토에 짚을 섞어서 벽을 치고 겉에 입자 고운 회를 바를 때도, 대청마루를 만들 때도 고단함보다 기쁨이 더 컸을 것이다. 완성된 기와집에서 첫 밤을 보낼 때 부모님은 마주 보고 하얗게 밤을 지새웠을 것 같다.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에 있던 돌담들이 허물어지고 꼬불꼬불하던 골목길이 시멘트 블록 담장으로 반듯해졌다. 우리 집 돌담도 그렇게 헐려 나갔다. 엄마는 담으로 쌓은 블록 구멍에 흙을 넣고 채송화를 심었다. 색색의 꽃이 피어나면 지나던 사람들이 예쁘다고 한 마디씩 했다. 담장 안쪽에는 단 석류가 열리는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 나무에서 아직도 석류가 열리고 가을이면 달고 굵은 석류가 몇 알이라도 택배차를 타고 우리 집에 온다. 우리는 그 집에서 부모님의 정성과 꿈을 먹고 자라며 어른이 되었다.

  내가 중년이던 어느 해 아버지는 재래식 부엌을 돋우어서 입식으로 고치고 식탁을 들였다. 욕조가 있는 욕실을 만들어서 편리함을 갖추게 되었다. 아버지의 생각이 유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결혼하고 자식 낳아 키우며 몇 번 이사했다. 처음 아파트를 분양받았을 때, 좀 더 큰집으로 이사했을 때 그 기뻤던 느낌이 아버지가 집을 지으며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엔 엄하고 불같은 성격이라 어릴 땐 아버지가 무서웠다. 어쩌다 이른 아침 잠이 붙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보면, 아버지는 아궁이 불씨를 깨워서 가마솥에 물을 데워놓고 아침햇살 한 줄기 기웃거리는 마당을 싸리비로‘싸륵싸륵’ 비질하고 있었다. 그때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오래전 아버지는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하셨다. 당신이 일구던 밭 언저리 잔디 지붕이 있는 곳으로 홀로 가셨다. 아버지가 떠나고 엄마마저 집을 지킬 수 없는 몸이 되니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글게 하던 그 집은 순식간에 폐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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