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결정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오키나와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쌀로 빚는 증류주‘아와모리’라는 전통술이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와모리(?) 어디서 들어본 듯했다. 그랬다. 얼마 전 엘지트윈스가 2023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날, 28년 동안이나 갇혀있다가 세상에 나오게 된 전통주라고 언급된 술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명맥을 이어 오는 유명한 전통주가 많이 있다는 것을 모 프로그램을 통해서 보았다. 그중에 증류주로는 감홍로(甘紅露)와 안동소주가 기억난다. 그때 이런 유명한 소주(燒酒) 외에 부산 산성마을에서 명인이 수제 누룩과 쌀로 만든다는 ‘산성 막걸리’도 전통주로 함께 소개했다. 막걸리 제조 과정을 보면서 예전에 엄마가 술을 담그던 모습이 떠올랐다.
가끔 엄마는 마당 가운데 멍석을 깔고 그 위에 얇은 옥양목을 나붓이 올려놓고 갓 쪄낸 찰 고두밥을 펼쳤다. 따끈한 고두밥에서 아지랑이 같은 김이 올라왔다. 온전히 쌀로만 만든 밥은 제사 때 올리는 메와 찰떡을 만들기 위해서 쪄낸 찰밥이 다였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마당에 펼쳐진 하얀 쌀밥을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멍석으로 다가갔다. 엄마는 고두밥 한 줌을 꼭꼭 뭉쳐서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단단하고 쫄깃한 고두밥을 손에 쥐고 야금야금 뜯어먹으니 달짝지근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한 김 나간 식은 고두밥을 큰 대야에 담고 누르께한 밀의 껍질이 그대로 드러난 둥근 방석 모양의 누룩을 잘게 부수어 고두밥에 부었다. 엄마는 소맷부리를 걷어 올린 팔을 쭉 뻗어 대야 안에 깊이 넣고 고두밥과 누룩가루를 골고루 섞었다. 그런 다음 적당량의 물을 부어서 항아리에 담았다. 술을 담그는 것이다. 항아리 위에 면 보를 덮고 방 한구석에 두면 항아리를 건들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술 단지가 흔들리거나 이물질이 들어가면 술맛을 망치게 된다. 엄마는 가끔 항아리에 귀를 대보기도 하고 어느 땐 면 보를 살짝 벗기고 들여다보기도 했다. 아버지도 궁금증에 술 단지 앞으로 얼굴을 디밀며 괜스레 엄마한테 말을 붙여본다.
“술이 잘되고 있는 것 같나?”
“아이고, 저리 가소. 부정 탈라.”
엄마의 핀잔 소리는 평소의 목소리와는 달랐고 아버지는 멋쩍은 듯 눈가 주름이 더 깊게 보이는 웃음을 띠며 한발 물러섰다.
며칠 지나면 항아리 안에는 누룩의 하얀 가루와 밥알은 잘 보이지 않고 밀 겨만 둥둥 떠 있다. 고두밥이 삭아 흐물흐물해진 밥알이 서너 알 떠오를 때면 항아리 안에서는 뽀글뽀글 소리가 났다. 그러고 아주 천천히 샘물이 솟아오르듯이 밀기울을 헤집고 퐁 퐁 구멍이 생기고 술이 익어갔다. 어른들은 잘 익은 술인지 낭패한 술인지 냄새로 알았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 새콤하고 달큼한 술향기가 방 안에 퍼지면 촘촘한 체를 조심스레 항아리 안에 넣고 맑은술을 따로 분리해 내었다. 청주를 떠내고 나머지를 잘 주물러서 밀기울을 걸러내면 막걸리가 되었다. 먼저 뜬 청주는 제주(祭酒)로 쓰고 막걸리는 아버지 몫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술의 종류를 가리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집에서 담근 술을 특히 좋아하셨다.
제사가 없어도 엄마는 가끔 술을 빚었다. 아마 고된 농사일을 하는 아버지를 위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여름 술은 농주로 아버지 등짐을 가볍게 해 주고 겨울엔 아버지의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을 들을 수 있는 애주가 되었다. 아버지는 술에 젖은 소리로 내 이름을 노랫가락처럼 부르기도 했다.
어느 해 아직 다 익지도 않은 술이 시금털털해서 버린 적이 있는데 옆집 할머니와 엄마는 술 항아리를 들여다보더니 부정을 탔다며 애석해했다. 고두밥과 누룩, 물로만 담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수많은 법칙이 숨어있었다. 잘 발효된 누룩과 고두밥의 비율, 물의 양, 항아리의 청결함은 기본이고 술이 익는 온도도 계절에 따라 달라야 했다. 엄마는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서 술 담는 날은 길일로 택하며 첫새벽에 샘으로 가서 맑은 물을 길어오는 등 정성을 다했다. 모든 재료가 항아리에 들어간 날부터 술이 되어서 세상에 나오는 이레 정도가 얼마나 가슴 조이는 기다림의 시간이었을지 그 마음이 짐작 간다.
바꾸어 생각해 보면 ‘부정을 탔다.’라는 뜻은 술이 완전히 익을 때까지 조심성이 부족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어디 술뿐이랴. 자식 키우는 일, 농사일 등 소중히 여기는 모든 건 부정 타지 않게 조심하며 조상이 하던 풍습대로 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살아생전 비싼(?) 술 한 병 따로 사드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기껏 소주나 막걸리였다. 그마저도 건강을 염려한단 핑계로 꼭 한 마디씩 했다.
“아버지, 이제 술 좀 그만 드세요.”
“허허, 이 맛있는 술을 안 먹으면 무슨 낙으로 사노?”
농사일의 고단함과 당신만의 외로움을 한잔 술에 위로받았음을 너무 늦게 이해했다. 아버진 술로 인한 질병도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후회된다. 때로는 술이 자식보다 아버지를 더 위로하고 즐겁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그곳에서 사 온 아와모리를 보니 아버지 생각이 더 났다.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었던 이 술, 술을 좋아했던 아버지 제사상에 올리고 싶었다.
“아버지, 이 술 한잔 드셔 보세요. 일본 여행 가서 샀는데 제법 전통 있는 유명한 술이래요. 엄마가 담가준 ‘탁배기’보다 맛있을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축문(祝文) 짓듯이 당장 아버지하고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몇 달을 더 기다려야 아버지 기일이 돌아온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숫자가 크다고 긴 것은 아닐 것이다. 술이 익어가는 시간도 기일을 기다리는 것도 기다림은 마음의 시계가 정할 것이다. 살면서 찰나가 억겁 같을 때도 있지 않았던가.
오늘따라 엄마가 빚었던 그 술을 한잔 마셔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