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장서 『생의 한가운데』」
철학자들의 명상집이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연애소설을 보며 십 대의 마지막을 방황하고 있을 때 우연히 만난 책이 루이제 린저의『생의 한가운데』이다. 그 시절 나는 이 책의 ‘니나’를 통해 삶과 사랑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사상이 깊게 배어있던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고 지금까지도 ‘니나’의 정신세계가 내 생의 감정선에 깔려 있다.
작가 루이제 린저는 (1911~2002) 독일에서 태어나 뮌헨대학에서 교육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린저가 1940년 완성한 처녀작『유리반지』는 자전적 성장소설로 출세작이 되었다. 그러나 반나치 활동으로 출판이 금지되고 구금되었다가 종전 후 석방되었다.
『생의 한가운데』는 삶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여자, 니나 부슈만을 통해 사랑의 본질적인 의미를 탐구한 작품으로 2차 세계대전 후 가라앉은 독일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루이제 린저는 이 작품으로 슈켈러 문학상을 받았다.
책은 열두 살 많은 언니가 니나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첫 페이지가 시작된다.
의사이며 대학교수인 슈타인은 니나가 슈타인의 병원에 처음 찾아온 날부터 관심을 가지게 된다. 니나를 치료하면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20살이나 어린 니나와 사랑을 이루는 일은 어려웠다. 나이 차이도 있지만 서로의 기질이 너무 달랐다. 니나는 광기와 절망에 차 있고 자살도 시도하고 자유분방하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반나치 활동을 하며 자신의 삶을 주관적으로 산다. 그녀는 사랑도 삶도 죽음도 모두 자기의 생이라며 거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슈타인은 그런 니나를 계속 걱정하고 그리워하지만, 니나에게 더 넓은 무대가 필요할 것이란 생각에 마음을 접어 보기도 한다.
니나는 약혼자가 있지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약혼자와 결혼 후 남편의 아이를 낳은 뒤 이혼한다. 그러면서도 슈타인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한다. 니나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두 권의 책을 집필하고, 한 권은 성공하지만 한 권은 금서로 처분받는다. 그녀의 반정부 활동은 계속되고 결국 내란방조죄로 체포되어 형을 받지만, 다음 해 독일이 전쟁에 지면서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이 부분은 작가 린저의 실제 삶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슈타인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함께하지 못하고 수호천사처럼 적당한 거리에서 그녀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도우면서 지독하게 아픈 사랑을 죽을 때까지 18년 동안이나 한다.
슈타인이 늙고 병들어갈 때 니나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으며 바쁜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니나가 꽃을 들고 아픈 슈타인을 찾아와서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이때 슈타인은 “내가 어두컴컴하고 출구 없어 보이는 복도를 무한히 걸어갈 때면 너는 언제나 문을 열어주었고, 나에게 와서 햇빛이 찬란한 넓은 평야의 광경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 평야에 내가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으나 그 광경만이라도 나를 최후의 절망에서 구제했다.”라고 말한다. 니나가 슈타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슈타인은 돌아가는 니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이승에 대한 작별의 슬픔을 느끼고 아름다운 해후를 선사한 자신의 생에 감사한다.
니나만 바라보며 평생 고독한 삶을 살았던 슈타인과 주관적이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부슈만 니나의 사랑과 생에 관한 이야기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의 십 대 끝자락은 삶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옥죄어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잘해야 한다는 것과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나를 주눅 들게 하고 내가 가치 없는 인간인 것 같아서 웅크린 마음이 더 쪼그라드는 걸 매일매일 느꼈지만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정립되지 않는 가치관에 혼란스러웠고 세습적인 관습에서 매일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니나를 만났다. 슈타인 박사가 예쁘지 않지만, 마음이 끌린다는 니나의 외모가 우선 반가웠다. 그때 나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도 지니고 있었다. 십 대 후반의 니나가 갖고 있던 광기와 절망, 자살을 시도하고픈 의식이 나에게도 있음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고 나를 옥죄던 불안감도 이런 의식에서 나오는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십 대의 니나를 보면서 불안했던 나 자신이 위안 되었다.
‘괜찮아,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그때의 나는 자유분방한 니나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보며 함께 숨죽이고 응원하며 내 안에 숨어있던 용기를 끄집어냈다. 비록 니나처럼 내 생각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진 못해도 분별할 수 있었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나를 위로할 수는 있었다. 『생의 한가운데』는 나의 젊은 날 부적처럼 내 책상 위에 오래 있었다.
살아오면서 턱 턱 숨 막히는 관계의 고비를 넘을 때도 사랑의 본질에 대해 회의하던 시절에도 옳은 것을 위해 진정한 용기를 내지 못할 때도 책장 속에서 눈 마중하는 이 책을 보며 ‘괜찮아, 괜찮아.’라며 생의 한가운데서 날숨을 내쉬었다.
노년인 지금도 때론 어느 쪽으로 발을 옮겨야 할까 머뭇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땐 책장을 쓰윽 훑어본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좋아하는 몇 권의 책과『생의 한가운데』가 있다.
니나를 통해 “우리가 정신 속에서 우리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끔찍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린저는 말한다. 그의 이 말이 내가 『생의 한가운데』를 놓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니나의 주체적인 사랑과 용기 있는 행동, 자유분방한 주관적인 삶을 동경하던 십 대는 아니지만 “생은 힘든 거야. (...) 아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라는 루이제 린저의 절규를 무한 긍정하고, 삶의 경험으로 이 말을 공감하는 나는 생을 마칠 때까지 『생의 한가운데』를 애장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