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빛의 홍콩: 춘절 여행자를 위한 다정한 안내서

붉은 등이 켜지면, 비로소 시작되는 항구의 시간

by 하루담음

축제는 늘 소란스러운 적막과 함께 찾아온다.


매년 이맘때 홍콩은 붉은색의 바다로 변한다. 빅토리아 하버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습한 열기 대신 차가운 기대가 실릴 때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손에 붉은 봉투 '라이시'를 쥐고 거리에 나선다. 춘절(春節)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파도가 도시를 덮치면, 평소 고층 빌딩 숲 사이를 바쁘게 유영하던 이들의 발걸음도 잠시 멈춰 선다.


낡은 트램의 덜컹거림 속에서도,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꽃시장의 난초 향기 속에서도, 우리는 곧 사라질 것들을 붙잡으려는 듯 간절하게 새해의 안녕을 빈다.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기 전, 도시는 마치 숨을 고르듯 팽팽한 긴장감과 느슨한 휴식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보았다. 문을 닫은 상점들의 셔터 위에 붙은 붉은 종이들이 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장면을. 누군가에게는 대목의 기회일 테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 년 중 유일하게 허락된 '멈춤'의 시간이다.


화려한 침사추이의 야경 뒤편, 셔터를 내린 노포의 주인은 가족들과 함께 모여 따뜻한 '뿐초이'를 나누며 숫자로 치환되지 않는 행복을 기록한다. 축제의 화려함은 결국 누군가의 쉼표 위에서 피어나는 법이다. 우리는 늘 반짝이는 불꽃에만 열광하지만, 정작 그 불꽃을 쏘아 올리기 위해 어둠 속에서 분주히 움직였던 손길과, 그 시간을 기다리며 비워둔 빈 거리의 미학을 잊곤 한다.


낯선 도시의 명절은 이방인에게 묘한 소외감과 동시에 깊은 소속감을 선사한다. 가게들이 문을 닫고 거리가 비워질수록, 도시의 속살은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왁자지껄한 딤섬 집의 소음 대신 들려오는 사자춤의 북소리는 심장 박동과 닮아 있고, 화려한 불꽃놀이가 끝난 뒤 수면 위로 가라앉는 화약 냄새는 삶의 지독한 현실감을 일깨운다.


여행자로서 내가 마주한 홍콩의 춘절은 단순히 노는 날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시간을 털어내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치르는 가장 정중하고도 뜨거운 의식이었다. 비워진 거리와 닫힌 문들 사이로 흐르는 공기는 평소보다 훨씬 더 밀도 높게 나를 감싸 안았다.


밤하늘을 수놓았던 불꽃의 잔상이 바다 아래로 침잠한다. 화려했던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내일의 문을 열기 위해 준비하는 고요한 다짐들이다. 붉은 등이 하나둘 꺼지며 도시는 다시 익숙한 일상의 속도로 되돌아갈 채비를 한다.


축제는 끝났지만, 그 뜨거웠던 온기는 사람들의 옷깃에 스며들어 한동안 식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각자의 바다로 흩어지겠지만, 그날 보았던 붉은 빛의 잔상만큼은 마음 한구석에 등불로 남겨둔다. 계절이 바뀌고 다시 바람이 불어올 때, 그 따뜻했던 멈춤의 기억이 우리를 다시 걷게 할 것임을 믿는다.




축제의 소음 너머, 당신이 마주할 특별한 휴식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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