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끝에 새겨진 그 계절의 온기와 파도 소리
해운대 시장 골목 어귀, ‘가온밀면’에 들어서자 뭉근한 한약재 향이 코끝을 스쳤다. 주문과 동시에 뽑아낸다는 면발은 여행자의 조급함을 잠재우듯 차분하고 쫄깃했다. 살얼음이 띄워진 육수를 한 모금 들이켰을 때, 머리가 띵해지는 차가움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부산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낯선 도시가 건네는 첫인사치고는 꽤 강렬하고도 시원한 환대였다. 그 한 그릇의 밀면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일상의 묵은 피로를 씻어내는 정화의 의식과도 같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광안대교에 불이 켜질 무렵, 나는 ‘해운대 암소갈비집’의 오래된 기와 아래 앉아 있었다. 타오르는 숯불 위에서 춤추듯 익어가는 생갈비. 그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묘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다.
입안에 넣자마자 눈 녹듯 사라지는 고기의 부드러움과 가장자리에 졸여진 감자사리의 달큰함은, 바쁘게 사느라 잊고 지냈던 미각의 기쁨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배를 채우는 행위가 이토록 충만한 행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살았던 것이다.
이튿날은 조금 더 투박하고 진한 부산의 속살을 파고들었다. 서면의 국밥 골목, 펄펄 끓는 뚝배기들이 내뿜는 열기는 부산 사람들의 삶 그 자체였다. ‘송정 3대국밥’의 맑은 국물에 부추를 듬뿍 넣어 한 술 뜨니, 뜨끈한 기운이 식도부터 위장까지 꽉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든든한 그 맛은 "괜찮다, 다 잘 될 거다"라고 등을 두드려주는 투박한 위로 같았다. 남포동 거리에서 호호 불며 베어 문 ‘씨앗호떡’의 달콤하고 짭조름한 맛은 또 어떠한가. 2천 원짜리 호떡 하나에 아이처럼 웃을 수 있는 그 순간이, 어쩌면 이번 여행이 내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의 마지막은 기장의 바다와 마주했다.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웨이브온’ 창가에 기대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 유리창 너머로 부서지는 파도는 지난 며칠간 채워 넣은 미식의 기억들을 차분하게 소화시켜 주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마주한 ‘금수복국’의 맑은 지리탕 한 그릇. 그 개운한 국물은 아쉬움마저 시원하게 씻어내 주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북돋아 주었다.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고, 그토록 맛집을 찾아 헤매는 걸까.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낯선 곳에서 마주한 따뜻한 한 끼가 주는 위로, 좋은 사람과 음식을 나누며 깊어지는 대화, 그리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느껴지는 원초적인 행복.
그 모든 순간이 모여 다시 살아갈 힘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부산에서의 2박 3일은 내게 단순한 미식 기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다와 바람, 그리고 정성 어린 음식들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치유의 시간이었다. 이제 나는 이 든든한 기억을 도시락처럼 싸 들고,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간다. 언젠가 또다시 마음이 허기질 때, 짭조름한 부산의 맛을 떠올리며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부산, 그 맛의 기록들 소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워준 2박 3일간의 미식 기록. 당신의 여행도 이토록 다정하기를 바라며, 제가 걸었던 길과 머물렀던 식탁의 상세한 정보를 남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