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와 숲의 위로, 겨울 울산 가볼만한 곳

가장 차가운 계절에 마주한, 비로소 뜨거운 다짐에 관하여

by 하루담음

새해라는 들뜬 이름표를 떼어내고 나면, 1월은 그저 견디어야 할 무채색의 시간처럼 느껴지곤 한다. 도시의 회색 빌딩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조한 온기에 지쳐갈 무렵,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동쪽 끝, 울산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겨울이 빚어낸 가장 투명한 파랑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는 길, 차창을 두드리는 바람은 매서웠으나 그 끝맛은 묘하게 상쾌했다. 가장 먼저 닿은 곳은 대왕암공원이었다. 수천 년의 시간을 파도와 맞서 온 기암괴석들은 마치 굳건한 약속처럼 해안가에 서 있었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출렁다리에 발을 디뎠을 때, 다리는 거센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불안이라기보다, 살아있음의 리듬에 가까웠다. 발아래 넘실대는 검푸른 바다는 내 안의 묵은 감정들을 집어삼킬 듯 포효했고, 나는 그 거대한 자연의 호흡 앞에서 비로소 겸허해질 수 있었다. 바다는 말이 없었지만, 그 거친 파도 소리가 나에게 "괜찮다, 흔들려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발길을 돌려 닿은 곳은 섬 끝자락의 슬도였다. '비파 소리가 나는 섬'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처럼, 갯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는 하나의 연주곡 같았다. 삭막할 것이라 여겼던 겨울의 섬에는 뜻밖에도 붉은 동백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차가운 해풍을 맞으며 피어난 그 붉은 꽃잎은, 시련 속에서도 기어이 피어나는 희망의 은유처럼 보였다. 화려하지 않아도, 소란스럽지 않아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들의 위대함. 나는 슬도의 방파제에 앉아 붉은 꽃과 푸른 바다가 빚어내는 강렬한 대비를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그것은 겨울이 내어주는 가장 따뜻한 위로였다.


여정은 태화강 국가정원의 십리대숲으로 이어졌다. 겨울의 해가 짧아 어둠이 내려앉자, 대나무 숲은 또 다른 세상으로 변모했다. 잎을 다 떨군 겨울 나무들 사이에서, 홀로 푸르름을 잃지 않은 대나무들은 올곧은 선비의 기개처럼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서로의 몸을 부비며 내는 소리는, 춥고 긴 겨울밤을 견디는 그들만의 대화였으리라. 도심 한가운데 흐르는 강물과 그 곁을 지키는 숲의 조화는, 산업 도시라 불리던 울산의 거친 껍질 속에 숨겨진 부드러운 속살을 보여주는 듯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생명은 이토록 끈질기게 호흡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닿는다는 간절곶이었다. 화려한 일출의 순간은 아니었으나, 정오의 햇살을 받아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는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소망우체통 앞에 서서 나는 엽서 한 장을 적지 못하고 그저 서성였다.


어쩌면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이루어질 소원이 아니라, 그 소원을 빌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아니었을까.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는 내 안의 옹졸했던 조바심들을 겨울 바다에 조용히 흘려보냈다.


돌아오는 길,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마음의 온도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울산의 겨울 바다는 나에게 단순히 풍경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차가움 속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뜨거움을 가르쳐 주었다.


바위처럼 단단하게, 대나무처럼 올곧게, 그리고 동백처럼 붉게 살아갈 힘을 얻었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 당신도 그 푸른 위로의 바다 앞에 서 보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당신만의 잃어버린 계절을 다시 찾을 수 있을 테니.




겨울 바다의 낭만을 현실로 만드는 법 [1월 울산 여행, 실패 없는 동선과 숨은 명소 5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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