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쓰는 글
부모님에게 난 버거운 아들이다. 특히 엄마한테는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아들이기도 하다. 외가에서 형제자매 중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던 언니와 남동생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 거다. 공부를 잘 하지만 생각이 많고 우울한 분위기를 품어내는 나는 늘 신경 쓰이는 아들이다. 나조차도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큰 이모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는 걸 보면 마냥 의미 없는 걱정은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가 나에게 늘 강조하던 이야기가 있다.
"살면서 공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는 많이 어렸던지라 부모님이 나를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누나의 성격을 자주 칭찬했다. 내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덤으로 내 인생에 공부가 중요하다는 걸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불만 많은 주제에 눈치도 더럽게 많이 보는 성격이었다.
가족끼리 서로 모여 이야기할 때 늘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가 있다. 부부싸움을 할 때나 누나가 엄마에게 혼나고 있을 때, 어린 나는 늘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고 그렇게 분위기가 풀렸다. 다들 그 이야기를 하며 어린애가 얍삽했다고 박장대소를 한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웃었지만 그 당시를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가 없다. 그건 어린애가 살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었다. 부부싸움이 아이에게는 전쟁과 같은 충격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 공감이 되었던 이유는 그 당시의 내가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었을 거다.
제사를 지낼 때 옆에서 요리를 같이 하고 설거지를 도맡아 했던 이유는 아빠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보다 엄마가 나를 보고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눈치 보는 성격은 어디 가지 않고 속마음을 숨기며 괜찮은 척을 많이 하며 지냈던 것 같다.
가정형편에 불만이 많았지만 아이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었던 패딩도 애써 쿨한 척 필요 없다고 애썼던 내 모습도 그런 데서 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때때로 나를 쉽게 키웠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자식 키우는 게 쉬웠다는 말이 아니라 어렸을 때 솔직하게 했어야 할 의사표현을 하지 않고 눈치를 봤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난 불만만 가지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나서부터 어리석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대학생이 되고 새로 사귄 친구들과 가족 이야기를 할 때 묘한 괴리감이 들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신기해했다.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린 적이 없고 고등학교도 스스로 선택해서 갔다는 이야기는 신기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들은 오해를 했다. 내가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오히려 나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연애를 해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구속한다. 그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그런 욕심을 버리고 상대방이 자유롭게 지내면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
그건 정말 웬만한 사랑으로는 불가능하다.
부모님이 나의 공부나 학교를 포함해 인생에 있어서 큰 선택에 한 번도 태클이나 의견을 내지 않았던 건 방목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를 사랑해서이다. 더 나아가 누군가는 방목으로 느낄 수 있는 행동을 당사자인 내가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걸 알게 해 주는 건 더 대단한 일이기도 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좋은 의미로 포기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건 지독한 노력이다.
브런치에서 쓴 첫 글을 보면 조금 알 수 있겠지만 엄마는 내가 우울한 순간 누구보다 의연하게 나를 맞이해주었고 보듬어주었다. 물론 타인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고 의지한다는 건 위험할 수 있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아서 때때로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준다. 그럴 때 안전고리가 되어주는 엄마가 있다는 건 모두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걸 엄마에게 받았다.
군대를 전역하고 집에 돌아간 첫날, 엄마는 나 몰래 울고 계셨다. 알고 보니 직장에서 동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깊게 받으신 상황이었다. 직장동료에게 마음을 너무 많이 주지 말라고 이야기했었지만 엄마 성격 상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엄마는 직장에 나가지 못하셨다.
갱년기도 엄마를 괴롭혔다. 자식만을 생각하면서 보낸 세월을 후회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동안 본인의 인생이 없어서 허탈해하셨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식을 위한 삶이 행복할 거라 함부로 생각했다. 물론 자식을 위해 살아가는 엄마의 삶이 잘못됐다거나 가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도 사람이다. 나와 같이 개인의 인생이 중요한 사람이다. 근데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너무 익숙하게 엄마는 엄마라고 생각해왔다.
큰 결심을 했다. 엄마가 힘들어하면서도 다른 직장을 찾고 다니는 이유는 오직 나였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나를 지원해주지 못하는 건 엄마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 짐을 덜어드려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며칠간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었다. 같이 울면서 엄마의 인생을 이해해나갔다.
물론 어찌 감히 엄마의 삶을 다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부모가 된 적이 없어서 아니 부모가 되어도 엄마만의 인생을 이해하긴 어려울 거다. 다만, 엄마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엄마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이제 엄마의 삶을 살아줘.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니까 내가 책임질게. 내가 봤을 때에 엄마는 이제 귀농해서 흙 만지면서 사는 게 스스로에게 행복할 것 같아."
그러면서 덧붙였다.
"내가 성인이 되고 많은 경험을 한 건 아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엄마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 내 행복을 위해서라도 이제 엄마가 행복한 걸 찾아서 했으면 좋겠어."
그 말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을까.
그다음 날부터 할 수 있는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휴학을 하고 작은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 일하기도 하고 돈을 더 많이 모아야 할 때엔 인력사무소에 가서 일하기도 했다.
스스로 모은 돈으로 전세방을 구하고 대학교 등록금도 내면서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조금은 나를 든든하게 생각하시고 엄마의 삶을 살아가시기 시작했다.
엄마의 생신날이었다. 음악을 좋아하시는 엄마를 위해 스피커를 준비했다. 달랑 스피커만 주기에는 그래서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었다.
'나의 엄마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엄마의 삶을 존경해.'
엄마는 우시면서 감사해하셨다. 부모의 마음을 모르지만 자식에게 존경한다는 말을 듣는 건 최고의 칭찬이겠지. 근데 사실 존경할 수 있는 엄마를 뒀다는 건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귀농을 하고 많이 행복해하신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하시면서 농사일이 신기하고 즐겁다며 이야기를 늘어놓으신다. 물론 재미는 없다. 하지만 엄마가 즐거워하셔서 같이 즐겁다. 어쩔 때는 엄마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아서 즐겁기도 하다.
일련의 경험은 엄마와 나의 관계를 많이 바꾸어놓았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이전에는 엄마로서의 엄마로만 생각했다. 이제는 같은 사람으로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게 된 것도 같다. 서로의 인생을 위로하기도 하고 응원한다. 물론 서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가족이 소중한 이유는 이해되지 않아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위로하고 응원할 수 있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생 엄마의 아들이다. 내가 아무리 성숙해지고 뛰어난 사람이 된다고 한들 엄마의 눈에는 평생 아들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다 보면 안정된 직장을 구하는 시기가 늦어질 테고 이 세상을 완전히 알거나 이해하실 수 없으시니까 걱정되기도 하실 거다. 시간이 더 지나고 부모님이 금전적으로 힘들 때에도 쉽게 엄마를 돕기는 어렵겠지.
그럼에도 큰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서로의 인생을 존중하면서도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가 필요한 순간 엄마와 나는 이유를 불문하고 서로를 위로해주는 사이로 지낼 수 있다면 다른 건 사소한 문제일 거다. 우리는 그런 사이로 지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기 위해 노력할 거란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