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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이호이 Aug 06. 2021

감정을 찾아가는 과정

누군가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한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살아가는 건 어린 나이를 생각할 때 가혹한 일이다. 그래도 꿈이 있는 친구들이나 성인이 되어 지금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마음껏 즐기겠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하루하루를 그들만의 빛나는 감정으로 채워나가는 것 같다. 문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스프링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공부하고 목적 없이 성적에만 집착하며 지내던 시절.

나의 고등학생 시절을 설명하는 문구다. 여기에 한 꼬집 더한다면 행복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삐뚤어진 마음 정도.

친구들과 유치한 말과 행동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지내는 날보다 한 문제 틀리고 스트레스로 땀을 쏟아내듯 흘리며 잠드는 하루가 더 익숙한 일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잘 버티며 지내기에는 감정의 폭이 너무 좁았고 어두컴컴했다. 더 큰 문제는 감정 자체에 둔감했던 터라 이런 상황에서도 우울함을 느끼지 못한 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보냈다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고 늦은 사춘기가 찾아왔다. 목적 없이 살아온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온 사춘기는 그 시간만큼 더 많은 이자를 나에게 요구해왔다. 사채업자에게 돈을 뜯기듯 의욕을 빼앗기면서 점점 깊은 골짜기에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휴학을 하고 방 안에 홀로 누워있던 어느 날, 세상이 새까매지고 몸이 땅 아래로 꺼지게 되었고 더 이상 혼자일 수 없었다.


대뜸 집을 찾아갔다. 어리둥절해하는 부모님께 설명 대신

"나 여기 몇 달 동안 있을 거야."

라고 말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 당시에는 내 상태를 설명하는 것조차 너무 힘들어 내뱉은 말이었지만 부모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행동이었음을 이제는 깨닫는다.  

부모님은 불효자에게 아무 말 없이 매일매일 맛있는 밥을 해 주셨다. 부모님과 함께 밥 먹고, 예능을 보며 깔깔대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부모님의 노력이 무색하게 밤이 되면 몰래 눈물을 흘려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어느 날과 같이 밥을 해주시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나는 아들 얼굴 매일 볼 수 있어서 이 시간이 귀하지만 여기에 있으면 혼자 우울한 감정을 계속 되새김질하게 될 거야."

라고 말씀하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나에게는 부모님이 나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표현으로 느껴졌다. 덤으로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부모님 앞에서 추하게 펑펑 울었다. 눈물과 함께 우울을 조금 덜어낸 그날, 다시 서울에 올라갔다.


오랜 시간 동안 연락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었다. 문득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나로 인해 연락이 끊긴 친구들을 다시 마음대로 연락을 하는 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주저하게 되었다. 며칠간 고민하고 망설이다 조심스레 연락했다. 감사하게도 친구들은 원망 없이 반갑게 반겨주었다. 그들은 나의 진심을 오해하지 않고 들어주었고 오히려 우울에서 스스로 헤쳐 나오려 하는 내 모습을 칭찬해주었다.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다.

나중에 친구들 중 한 명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난 네가 옥장판 팔려고 연락하는 게 아닌가 했어. 너라면 팔아주는 셈 치고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온 거야."

왜 나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도 혼자 살아가는 외로움에만 빠져 지냈을까.  


유난스럽게 아픔을 겪고 조금은 아물어가는 과정에서 삶의 목적을 잡아가 보고 싶었다. 그래야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좌우명을 잡고 살아가야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죽는 날까지 조금씩이라도 전날보다 성숙해지는 사람이 되자.'

아직까지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성숙에는 다양한 분야가 있다. 본인의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것도 성숙해지는 과정이고 본인만의 가치관을 구축해나가고 지키는 것도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부족하고 어려운 걸 채워나가고 싶었다. 그래야 나를 믿으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가장 부족한 모습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었다. 이걸 해내면 무엇이라도 언젠가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참 잔인하게도 본인이 아파봐야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선택지에 넣을 수 있는 건 어리석게도 고통을 크게 겪은 후에서야 가능했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건 막다른 길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괴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은 논리적으로 할 수 있지만 감정이 솟아나질 않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누군가는 눈물 흘리고 누군가는 분노하지만 나는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소수자분들이나 고통받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모임이나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참여하는 다른 분들의 순수하고 열정에 찬 눈망울이 나를 괴롭게 했다. 순수하지 않은 목적을 숨기면서 그들을 위하는 척 활동하는 건 양심에 찔렸다.  첫 만남부터 솔직히 털어놓았다.

"다른 분들과 목적이 달라서 죄송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해서 참여했습니다. 공감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됩니다. 불쾌하시다면 여기서 빠지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무례한 행동이었고 불쾌한 사람이었다. 불청객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감사하게도 마음이 넓으신 건지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태도를 가상하게 여기신 건지 모르겠지만 잘 왔다고 반겨주셨다. 그런 환대가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그들의 입장과 아픔을 듣고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누군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외웠다. 누군가가 사회의 소수자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때에도 그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했다. 수학과 과학이 이해되지 않아서 외우는 아이들처럼 그들의 감정을 외우고 내뱉었다.

신기한 일이 생겼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답답함이 조금. 희망 없는 세상에 분노가 조금. 그럼에도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아니 잘 살아가야 하는 그분들의 삶에 눈물이 조금.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열렸다. 공감도 지능의 한 영역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까막눈이었던 내가 조금씩 그분들의 언어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아픔에 공감하고 같이 눈물을 흘리는 걸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이상한 존재처럼 취급한다. 그 누구도 감정을 노력하라는 조언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감정도 재능이라는 것이 있다. 감정을 시험 치면 난 낙제생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예 구제불능은 아니었나 보다.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 채로 오랜 시간 살았지만 아파야 했다. 갑각류가 탈피하고 새 살이 드러나듯 오랜 시간 아프고 난 후에 내 마음에 새 살이 돋아났다. 새살이 자라면 따가운 것처럼 더 아파하고 눈물 흘렸다. 그러면서 조금씩 성숙해졌다. 어느 순간 다른 사람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출발점에 겨우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조금씩 사회화가 되었다.


지독하게 아파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다양한 종류를 가진 감정이 다양한 색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따금씩 내 세상이 많이 어두워지지만 밝은 세상이 곧 다시 다가온다는 걸 알고 있다.

 

긴장되는 상황에서 아프게 뛰는 심장이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 줘서 조금은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고통스러워할 때 나의 역할이 감정의 쓰레기통이길 바란다.

누군가가 아픔을 이야기할 때 참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더라도 그의 고통은 나의 고통과 다른 성질이라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들어 주 것뿐이라는 걸 안다.

조언을 하기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너의 하루가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스스로에게 조금씩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조금씩 성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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