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아이는 7살이 되었다.
어린이집, 유치원 선생님들 얘기를 들으면 낯가림과 수줍음이 있지만
적응하는 시간이 지나면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나도 낯가림과 수줍음이 있어
마음처럼 친구를 사귀지 못해 참 아쉬운데
역시 내 아들이었다.
자식은 닮지 말았으면 하는 걸 골라서 닮는 거 같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코로나로 친구들 만나기 쉽지 않았고
유치원 하원 후에도 친구들과 놀 기회가 별로 없었다.
단지에 또래 아이들이 없기도 했고
내향형 엄마의 기운이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했는지 어쨌든 그랬다.
그래서 아이는 나랑 노는 시간이 많았다.
더 어릴 때 아이는 잠을 자다가 옆에 엄마가 없으면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고 같은 방 안에 없을 뿐인데도 마치 엄마가 버리고 간 거처럼 통곡하면서 울었다.
그때는 그런 게 힘들면서도 한 편으로는
'엄마가 없으면 많이 불안한가. 애착에 문제가 있나' 뭐 이런 이상한 연결고리로 이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엄마는 아이에게 절대적인 존재구나를 생각했었다.
아이랑 함께 게임을 하다가 내가 이기기라도 하면 아이는 그것도 대성통곡했다.
"놀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지면 엄마 한번 더 해요라고 하면 되는 거야'라는
나의 말은 아이의 귀로 전달이 되기도 전에 아이의 울음소리에 저 멀리 사라지게 된다.
그럼 나는 억양이 높아지고 조금 무서워진 목소리로 훈계를 하게 된다.
아이는 더 대성통곡을 하고, 나는 울음이 그치면 얘기하겠다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런 훈계 과정이 옳은 건지 모르겠지만
더 안 좋은 이야기를 하게 될까 봐 우선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 공간을 벗어났다.
하지만 아이는 나를 따라와서 안아 달라고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진짜 화가 나면 나는 아이를 안아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화가 난 건 저런 상황을 부드럽게 넘기지 못한
인내심 없는 나 자신 스스로에게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런 광경을 보고 신랑이 아이를 달래준다.
"아빠한테 와. 아빠가 안아 줄게. 울음 그치고 엄마한테 다시 가자. 아빠한테 와'
그러면 아이가 말한다.
"싫어. 엄마가 안아줘"
그럼 신랑이 웃으면서 말한다.
"너는 엄마한테 혼났는데 왜 엄마한테 안아달라고 해? 아빠한테 안아달라고 해야지. 엄마한테 혼나도
엄마가 좋아?"
그럼 아이는 대답한다.
"응"
멀리서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내가 울어버렸다.
별 것도 아닌 거에 아이한테 흥분한 것이 속상했는데 냉정한 엄마의 모습을 보고도
엄마가 좋다고 하는 아이의 말이 나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엄마를 늘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가끔 내가 너무 힘들면 아이를 밉게 생각했었다.
신랑한테 화 난 일이 있을 때 아이한테 화를 내고 혼을 낸 적도 있었다.
그래도 아이는 엄마가 좋다고 내 품에 안겼다.
아이는 절대적으로 엄마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있었다.
내가 어른으로 아이를 양육하고 있지만
사실 아이를 통해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그 절대적인 사랑에 대해 몸소 느끼고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