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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전히 Jan 19. 2022

이름에 대하여

막내라 부르기로 하였다

뭐가 좋을까.

웰시코기는 아무래도 엉덩이지.

엉덩이의 특징을 살려 네모라 부를까. 식빵이라 부를까.

털색이 갈색이니까 라떼는 어때.

아니야 좀 특별해야 해. 짱구라 부를까.

사람이름 붙이면 오래 산다던데 말순이는 어때.

영어이름도 있잖아. 졸리는 별론가.


 강아지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동생과 나는 하루 종일 이름에 대해 토론했다. 이 토론은 처음 시작된 건 동생이 대학을 합격하고부터였다.  부모님의 반대로 본가에서는 강아지를 키우지 못했기에 동생은 독립을 하면 강아지를 꼭 키우고 싶어 했다. 동생이 키운다는 건 나도 책임져야 할 부분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함께 살기로 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강아지를 데려오면 동생이 짊어져야 할 고난에 대해 알려주었다. 무려 한 달 넘게.


산책도 나가야 하고, 똥오줌도 치워야 하고, 집에서도 놀아줘야 돼.

사료나 간식도 매달 사야 하고.

병원 한번 가면 몇십씩 깨진다던데.

무엇보다 죽을때까지 함께해야 되는데, 할 수 있겠니?


 알려주면 안데려 올 줄 알았다.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이런, 정말 와버렸네.

 이젠 진지하게 이름을 지어야 할 때이다.  


 평생 우리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아야 할텐데 괜찮을까?

 이름의 의미를 얼마나 부여해야 하나?

 들었을 때 정감있는 이름인가?  

 아, 머리야.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누가 지어줬나. 나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드는가. 화합한다는 뜻이라는데, 화합은 개뿔. 어디가서 불란 안만들면 다행이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계속될 때쯤. 이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고민하는 걸까?라는 생각에 진지한 고찰이 시작되었다.


 데려오기 , 이름을 정했던  대화가 아무렇지 않았던 이유는 인형에게 이름을 붙이는 느낌이었달까. 인형에게 어제는 미미로 불렀다가 오늘은 쥬쥬로 부른들 누가 뭐라하리. 그러나  실체가 생기니 다른 차원의 개념이 되었다. 숨쉬지 않는 물체에게 이름을 붙이는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다. 불러도 응답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응답하는 이의 반응은 상관하지 않고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붙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명을 가진 이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은 하나의 약속이 되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쳐다봐야 하는, 이름을 만들어주는 순간 생기는 약속. 그렇기에 이토록 고민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아이가 불려질  어떻게 불려지느냐 까지 생각해야 하니까. 어쩌면 이름이 꼬리표가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불리며 존재를 확인받으니까.  어떻게 불리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강아지 이름을 '막내'라 부르기로 했다. 본가의 막내였던 나의 여동생은 기꺼이 그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여동생은 그 누구보다 '막내'라는 단어의 애정을 알았기에. 본인이 받은 사랑을 그대로 주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막내라 함은 그 집에서 죽을 때까지도 가장 어리며 그러므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니까. 막내란 언제나 응석 부려도 되니까. 막내는 언제나 보호받아야 하니가. 막내니까 허용되는 일들이 많았다.

 이 강아지가 영원히 밝고 건강하며 사랑받는 '막내'로서 우리의 곁에 있기를 바라며.


 막내야 잘 부탁해.


입양 직후 차에서 웅크리고 있는 막내
입양 후 첫 건강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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