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라 부르기로 하였다
뭐가 좋을까.
웰시코기는 아무래도 엉덩이지.
엉덩이의 특징을 살려 네모라 부를까. 식빵이라 부를까.
털색이 갈색이니까 라떼는 어때.
아니야 좀 특별해야 해. 짱구라 부를까.
사람이름 붙이면 오래 산다던데 말순이는 어때.
영어이름도 있잖아. 졸리는 별론가.
강아지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동생과 나는 하루 종일 이름에 대해 토론했다. 이 토론은 처음 시작된 건 동생이 대학을 합격하고부터였다. 부모님의 반대로 본가에서는 강아지를 키우지 못했기에 동생은 독립을 하면 강아지를 꼭 키우고 싶어 했다. 동생이 키운다는 건 나도 책임져야 할 부분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함께 살기로 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강아지를 데려오면 동생이 짊어져야 할 고난에 대해 알려주었다. 무려 한 달 넘게.
산책도 나가야 하고, 똥오줌도 치워야 하고, 집에서도 놀아줘야 돼.
사료나 간식도 매달 사야 하고.
병원 한번 가면 몇십씩 깨진다던데.
무엇보다 죽을때까지 함께해야 되는데, 할 수 있겠니?
알려주면 안데려 올 줄 알았다.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이런, 정말 와버렸네.
이젠 진지하게 이름을 지어야 할 때이다.
평생 우리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아야 할텐데 괜찮을까?
이름의 의미를 얼마나 부여해야 하나?
들었을 때 정감있는 이름인가?
아, 머리야.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누가 지어줬나. 나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드는가. 화합한다는 뜻이라는데, 화합은 개뿔. 어디가서 불란 안만들면 다행이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계속될 때쯤. 이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고민하는 걸까?라는 생각에 진지한 고찰이 시작되었다.
데려오기 전, 이름을 정했던 그 대화가 아무렇지 않았던 이유는 인형에게 이름을 붙이는 느낌이었달까. 인형에게 어제는 미미로 불렀다가 오늘은 쥬쥬로 부른들 누가 뭐라하리. 그러나 그 실체가 생기니 다른 차원의 개념이 되었다. 숨쉬지 않는 물체에게 이름을 붙이는 건 큰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다. 불러도 응답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응답하는 이의 반응은 상관하지 않고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붙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명을 가진 이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은 하나의 약속이 되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쳐다봐야 하는, 이름을 만들어주는 순간 생기는 약속. 그렇기에 이토록 고민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 아이가 불려질 때 어떻게 불려지느냐 까지 생각해야 하니까. 어쩌면 이름이 꼬리표가 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불리며 존재를 확인받으니까. 어떻게 불리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강아지 이름을 '막내'라 부르기로 했다. 본가의 막내였던 나의 여동생은 기꺼이 그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여동생은 그 누구보다 '막내'라는 단어의 애정을 알았기에. 본인이 받은 사랑을 그대로 주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막내라 함은 그 집에서 죽을 때까지도 가장 어리며 그러므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니까. 막내란 언제나 응석 부려도 되니까. 막내는 언제나 보호받아야 하니가. 막내니까 허용되는 일들이 많았다.
이 강아지가 영원히 밝고 건강하며 사랑받는 '막내'로서 우리의 곁에 있기를 바라며.
막내야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