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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인 아내와 금성인 남편

다른 별에서 온 우리가 살아가는 법

by 하이브라운

2, 9, 4, 3, 7, 8, 5, 10, 1, 6

1에서 10 사이의 수다.

사람들에게 1과 10 사이의 수를 말하라 하면 대부분은 순서대로 말할 것이다.

하지만 위의 방법 또한 틀린 것이 아니다. '순서대로'란 조건이 없었으니까.


내가 아내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연애 기간을 합치면 2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지냈지만 아직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봐서는 남자와 여자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인가 있음을 느낀다. MBTI로 설명할 수 없는.

* 참고로 우린 평화롭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지내고 있다. 정말이다. 믿어주세요.


6월의 연휴는 낯설다. 매년 6월은 7월의 방학을 앞두고 에너지 소모가 많은 달로 기억된다. 올해는 3일의 연휴가 선물처럼 주어졌다.

하나뿐인 아들은 2박 3일 일정으로 백두대간 등산 캠프를 목요일 하교 후에 떠났다. 연휴를 아들 없이 지내야 한다니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그리움은 자녀, 특히 아들 가진 부모님들은 알고 계실 듯하다.

연휴를 마음 편히 지내기 위해, 어제(목)는 직장에서 무수히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뿌듯하게 퇴근했다. 연휴에 읽을 책들과 요일별 운동 일정을 계획하는 마음이 즐겁다. 오랜만에 일어날 시간을 정하지 않고 잠들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함을 더해준다. 가뿐하게 밤 런닝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내일 아침으로 먹고 싶은 게 있어. 거기 가자~ 난 작업이 좀 남아서 당신 먼저 자" 경험이라는 투수는 직구와 변화구를 예상 못하게 골라서 던진다. 뭔가 작은 찝찝함을 품고 잠이 들었다.


상쾌하게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보며 연휴 첫날의 아침을 즐긴다. 이내 아내가 나갈 준비를 하자고 한다. 선크림을 꼭 바르라고 덧붙인다. 선크림. 선크림. 느낌이 좋지 않다. 걸어서 10시에 도착한 곳은 10시에 오픈을 하는, 집 주변의 산책로에 있는 베이글 전문점. 브런치를 즐기고 싶었던 마음이었나 보다. 아침에 빵은 잘 먹지 않지만 가까이 앉은 상대를 의식해서 맛있게 먹었다.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끊었던 감자튀김도 맛있게 맛있게. 소화는 내 선한 의도가 시켜주리라.


식사를 마치고 걸어서 30분 거리의 복합 쇼핑몰로 가야 한다고 한다. 아내와 아들에게 필요한 여름옷을 사기 위함이다. 휴일 쇼핑몰의 주차장 문제를 생각한 도보 이동 계획이다. 놀랍다.

가족 여행을 가면 단 1%의 계획도 없이 당일 이동 중에 스마트폰 검색을 하는 아내의 놀라운 이면을 본다. 선크림은 이때를 위한 작은 배려였으리. 감사했다.

도착해서 시작된 오늘의 하이라이트 옷 쇼핑.

아직도 적응이 어려운 부분이다.

아들과 본인의 옷을 고르기 위해 몇 개의 건물로 된 쇼핑몰(송파구 문정동 가든파이브)의 연결 통로를 무림의 고수처럼 능수 능란하게 이동한다. 한번 들어간 매장에서 빠른 손동작으로 개어진 옷을 폈다 접었다 하며 탐색한다.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아내라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엄마와 누나도 그렇게 쇼핑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 한 매장에서 5분이 넘어가면 난 자연스레 매장에서 나와 복도 한 곳에서 기다린다. 왜 그렇게 점원에게 미안한 걸까.

그러기를 두 시간. 표정을 보니 흡족한 쇼핑은 아니었나 보다. 이럴 땐 빠르게 당을 보충해줘야 한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연애시절 자주 갔었던 현대백화점 밀탑이라는 곳의 팥빙수 스타일의 빙수를 먼저 찾아야 평화가 찾아온다. 없다면 아이스크림에 와플도 괜찮다. 빠른 계산이 AI에 버금간다. 아쉽게 가든파이브 지하에는 없었다. 빠른 순발력으로 대체한 다방커피 메뉴와 호두과자(11개 중 2개를 커스터드로 교차하는 센스)로 아내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사계절이 자연스레 찾아오는 것처럼 아내의 다이어트도 3일 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자의 다이어트와 육아의 공통점은 시작은 있지만 끝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매번 시작한다는 말만 듣는다.

매일 만나는 교회 집사님들이 얼굴이 수척해졌다고 한다는데 나에게도 이번 다이어트의 효과를 묻는다. 3일 지났을 뿐인데 난감했다. 진실로 다이어트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걱정이 된다고 했다. 무리하지 말라는 지구와 운석 충돌급 걱정이 담긴 조언과 함께.


휴일의 첫날이 베이글 먹고, 옷 몇 개 샀을 뿐인데 반나절이 지났다. 비록 계획했던 독서나 운동은 못했지만 보람찬 하루였다.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웃으며 쐐기를 박는다.

"내 옷이나 아들 옷을 살 때는 당신 출근하고 혼자 와야겠어. 당신이 옆에 있으니 신경 쓰여서 제대로 보지 못했네. 다음 주에 다시 와서 고르려고"

오늘의 일과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2, 9, 4, 3, 7, 8, 5, 10, 1, 6

그렇다. 잊지 말자. 1부터 10까지의 수를 순서대로 세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사랑합니다 아내님. 곁에 있어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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