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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Jul 28. 2022

정체성, 나의 이야기

오늘은 아빠의 교양수업 첫 번째 시간이다. 첫 시간의 내용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을 많이 해보았는데 우선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에 앞서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할게.


세상은 거대한 이야기다. 수많은 존재들이 지구라는 커다란 무대 위에서 온갖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들을 겪다가 사라지는 아주 방대하고 끝없는 이야기지. 셀 수도 없이 많은 등장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사건들이 만들어지는 끝없는 혼돈의 이야기들이다.


‘호모 나란스 Homo narrans’는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뜻이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해.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진화의 결과물들이야. 진화는 한 집단 내의 유기체의 특징이 자연선택에 의해 세대에 걸쳐 변화하는 과정이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결국 진화의 결과물이라는 뜻이야.


인간은 약 7만 년 전부터 누적된 진화의 결과로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어. 언어를 사용하게 된 후론 생존에 대한 매뉴얼은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게 되었지. 어디에 먹을 것이 많이 있으며, 갑자기 비가 많이 오거나, 평소에 눈앞에 널렸던 사냥감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옆 동굴에 사는 루시에게 호감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삶의 지혜는 이야기를 통해 전해졌어. 


이야기는 큰 힘을 가지고 있어. 옛 페르시아 왕 샤리아는 우연히 왕비의 불륜을 목격하고 그 배신감과 복수심에 못 이겨 매일 처녀들과 하룻밤을 보내고 동이 트면 그 처녀들을 처형했어. 매일 왕과 하룻밤을 보내고 처형당할 처녀를 모집하던 페르시아 재상은 새로운 처녀를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차에, 그의 첫째 딸 세헤라자드가 자청하여 왕의 하룻밤 신부가 되었어. 세헤라자드도 다른 처녀들처럼 다음날 목이 없어지는 신세가 되었을까? 세헤라자드에겐 자신만의 탁월한 무기가 있었어. 왕을 제압할 수 있는 권법이나 최신 무기가 아닌 그건 바로 ‘이야기’였어. 세헤라자드는 왕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동트기 전에 현대 드라마의 엔딩 장면처럼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게 만들었지. 그래서 샤리아 왕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세헤라자드를 하루 더 살려두었고 이런 식으로 천 일 동안 지속되었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일야화가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다. 세헤라자드의 지혜와 기지 덕분에 더 이상 무고한 희생은 이어지지 않았고 그녀도 결국 왕비가 되었지. 이것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야.


원시 인류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기억해야 했어.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잘 기억하고 또 이야기를 잘 만들어내는 조상들이 남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듣는 조상들보다 많이 살아남았을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후손이기에 이야기를 선천적으로 좋아하게 되는 거야. 


인간은 궁금한 것들을 나름대로 고민하고 관찰한 결과를 이야기로 만들었고 세대를 거듭해 내려올수록 각색되어 유명해진 이야기는 그 사회의 ‘신화’가 되었어. 신화는 우주의 창조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의문들을 신이나 영웅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이야기로 들려주는 거야. 사람들은 신화를 통해 우주와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왔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의하면 이야기는 부족을 구성원의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 또는 신화들을 사람들끼리 공유하고 믿게 되면서 하나의 단단한 공동체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런 이야기를 믿는 부족들이 그렇지 못한 부족들보다 생존과 경쟁에서 유리했을 거야. 이야기가 부족원들에게 공통의 목표를 세워주는 거지. 그런 이야기들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어. 이야기를 통해 가상의 실재를 창조하는 능력은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어. 이야기의 다양성은 발전을 거듭하여 우리의 문화가 되었고 그 문화가 쌓이고 전수되어 지금의 역사가 되었다는 거야.


최초로 이야기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그 그룹의 리더가 되었을 것이다. 그 후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문명이 발생하면서 그들은 역시 최초의 지배계급이 되었을 것이고. 역사가 시작되면서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주는 사람과 이야기를 듣고 따르는 사람으로 나누어지면서 계급이 탄생하는 것이지. 지배 계급이 만든 신화를 민중들이 의심 없이 믿음으로써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렇듯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개념이고,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능력이야. 이야기를 해석하는 능력이 중요하고 또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도 중요하다. 세상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관점, 방법 등을 '세계관'이라고 하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정체성'이라고 하지. 올바른 세계관과 정체성을 가지고 이야기로 이루어진 세상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를 해서 그 커다란 이야기 속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인생인 것이다. 


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야.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써 나가야 할지 막연하다면 남의 이야기를 통해 영감을 얻을 수가 있어. 타인의 이야기, 지식 등을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 중에 독서가 있다. 책을 통해 타인의 삶을 경험할 수도 있고 인류가 그동안 겪어왔던 이야기도 접할 수가 있어. 한 권의 책을 읽으면 하나의 퍼즐이 튀어나온다. 그 퍼즐들을 잘 연결하면 나의 이야기를 만들 소재와 주제를 얻을 수가 있어.


나의 이야기를 쓰기 전에 우선 필요한 것이 이야기의 주제를 정하는 거야. 그 주제가 바로 인생의 목표라 할 수 있지. 삶의 목표를 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해. 그냥 열심히 하는 것과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란다. 남극에 가면 딱 두 가지 색깔만 존재한다고 해. 그건 파란색(하늘)과 흰색(눈)이야. 딱 두 가지 색깔만 존재하는 세상이지. 그래서 방향 감각을 찾는 것이 어렵다고 해. 예를 들어 남극에서 고립되었고 무조건 똑바로 만 걸으면 그 지역을 벗어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의 다리의 길이가 약간 차이가 있어서 본인은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같은 자리만 크게 빙빙 돈다고 해. 하늘색과 흰색만 있는 곳에서 목표를 세울 수가 없어서 결국은 같은 자리만 빙빙 돌다가 얼어 죽는 거지. 이렇듯이 목표가 없는 삶은 (본인은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할지 언정) 같은 자리만 빙빙 돌다가 얼어 죽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거란다.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 Viktor Frankl 은 본인이 창시한 로고테라피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했어. 첫째는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삶이야. 인간은 무언가를 창조할 때 즐거움을 느끼는 본능이 있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개인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들의 생산, 다시 말해서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생산하는 가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개인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자신의 생산에 부여된 물질적 조건에 달려 있다.” 쉽게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자기 인생의 가치는 ‘내가 하는 생산’에 달려 있다고 말했어.  


독일 출신의 미국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 Erich Fromm은 “죽음의 불안에 대처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창조적 생산”이라고 말했어. 창조는 고통이 동반되지만 그만큼 자기 생산성은 증폭된다고 앞서 마르크스가 얘기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야. 아빠도 뒤늦게 글을 쓰는 이유는 (늦었지만) 창조의 기쁨을 알았기 때문이지. 너도 창조하는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물론 그 소재는 네가 정해야겠지만.  


다음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사람과의 관계 맺음, 즉 사랑이다. 사랑이야 말로 힘든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야. 아빠의 삶도 점차 넓어지는 사랑의 확장이었어. 네 엄마를 만나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너를 만남으로써 사랑은 확장되고 증폭되었다. 또한 우리 가족을 넘어 우리 사회, 공동체로 사랑이 확장되어 행복한 공동체가 만들어 가는데 자그마한 도움이 되면 좋겠구나. 사랑의 확정은 곧 내 행복의 확장이 되는 것이니까.


엄마, 아빠가 너를 사랑으로 키우는 이유는 이 세상이 원래 사랑이 넘치는 사회임을 알려주기 위함이야. 설령 네가 살면서 사회로부터 사랑의 상실을 경험하더라도 네가 그 함몰된 부분을 채우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는 거란다. 네가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고 비록 세상이 너를 속일지라도 시련에 쓰러지지 않고 상실을 극복하는 멋진 청년이 되길 바란다.


프랭클이 제시한 삶의 의미를 찾는 마지막 길은 시련을 통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여기에 맹점이 숨어있어. 재미있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재미있는 이야기의 공통점은 바로 사건과 갈등 같은 시련이 있다는 점이야. 사건과 갈등이 없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을까? 재미있는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공통점은 바로 주인공이 각종 사건과 갈등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야. 세헤라자드가 샤리아 왕에게 신밧드의 이야기를 할 때 “신밧드라는 상인이 있었는데 그냥 별 어려움 없이 돈 많이 벌어 별 걱정 없이 편하게 오래 잘 먹고 잘 살았대요”라고 했으면 세헤라자드의 목은 계속 붙어 있을 수 있었을까? 신밧드가 항해를 할 때마다 각종 사건과 갈등이 벌어지고 그 역경들을 헤쳐나가는 과정이 다음날 또 듣고 싶은 재미를 불러일으키다 보니 세헤라자드는 계속 연명할 수 있었고 결국은 살아남아 왕비가 되었던 것이지. 왜 사건과 갈등이 있는 이야기가 재미있을까? 그건 아마 우리도 인생을 사는 동안 많은 사건과 갈등을 격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남의 사건과 갈등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지는 거지. 남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건과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습득하는 것이야.


프랭클은 자신의 로고테라피를 통해 인간이 시련이 휘몰아치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그 시련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음을 피력하였어.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사이의 C라고 말했다. 삶이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내리는 결정의 연속이야. 인생은 갈림길의 연속이고 지금의 나는 내가 그동안 선택들이 누적된 결과야. 목표가 분명해야만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누적된 결과물이 내 인생이 되는 거란다. 빅터 프랭클은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우리는 시련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는 있지만, 인간의 품격을 선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어. 시련의 폭풍 속에서도 내가 갈 길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선택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인생이야.


자신만의 ‘인생이라는 책’을 써 나아감에 있어 한 페이지도 넘기기 힘들 때가 있기 마련이야. 그냥 책을 덮어버리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 사르트르나 프랭클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순간순간의 선택을 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인내하고 견디면서 한 자 한자 써 나가다 보면 넘기지 못할 것 같았던 페이지도 넘기게 되고 그렇게 인생의 책을 써 나가는 것이다.  인생은 '몸으로 쓰는 소설'이다. 이렇듯 정체성이란 ‘사건과 갈등으로 둘러 싸인 인생을 어떻게 풀어가는지에 대한 나만의 이야기’인 것이야.


시인 박노해의 시 한 편을 소개하려 한다.


<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캄캄한 어둠만큼 밝아오는 것이니


이 시처럼 인생에서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잘못된 해석만이 있을 뿐이지. 모든 것은 해석의 문제야. 그 해석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철학이고. 니체는 자신의 저서 <유고>에서 “세계의 가치는 우리의 해석 속에 있다”라고 말했어.


지나간 과거는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 절대 바꿀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지나간 과거를 새롭게 달리 해석을 하는 것이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으로부터 자신에 대해 깨달은 것은 무엇인지, 세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무엇인지, 그로부터 바뀌게 된 삶의 원칙들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것이야.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하루하루 죽음보다 못한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삶을 선택하고 다시 해석하였고 그 경험을 토대로 자신만의 정신 치료 기법은 로고테라피를 정립하였어. 이렇듯 훌륭한 위인들은 결국 과거의 시련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조금 더 ‘성장’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재밌는 모든 이야기는 갈등과 좌절로 점철된 과정을 거쳐 도달하는 클라이맥스가 있어. 클라이맥스가 없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어 금세 잊히지. 그러니 지금 인생의 암흑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이 시기는 자신의 삶이 더 좋은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클라이맥스라 생각하자.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여 멋진 스토리로 마무리할지는 ‘나’라는 작가가 끝없이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세상은 거대한 넷플릭스 같은 드라마야. 드라마가 모여 ‘넷플릭스’라는 시스템이 되듯이 인류 모두의 이야기가 모여 ‘역사’라는 드라마가 되는 것이란다. ‘정체성’이란 ‘너의 드라마’를 쓰는 것이야. 아빠는 사랑하는 나의 딸이 휘몰아치는 시련의 폭풍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삶을 몸소 써나가는 멋진 ‘인생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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