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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Aug 26. 2022

주체성, 내 삶의 주인공

네가 태어나고 너의 눈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나의 딸, 너는 주체적인 삶을 살거라.” 


아빠가 생각하기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바로 정체성과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에 대해서 지난 편지에 얘기했었으니 오늘은 ‘주체성’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해. 정체성이 ‘나의 이야기’라면 주체성이란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되는 것’이다. 네 삶의 주인은 바로 네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자기 삶의 주인공은 당연히 본인이 되는 게 아닌가요?"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삶의 주인공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아빠도 살면서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은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는 점이야. 주체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거리의 철학자라 불리는 강신주 선생께서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면 주인이고, 남이 원하는 삶을 살면 노예이다.” 이런 정의로 비추어 보았을 때 아빠는 자신 있게 주인의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구나. 아빠가 지금 하는 일은 아빠가 하고 싶은 일이기보다는 아빠가 다니는 회사 회장님이 하고 싶은 일이니까.


사람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기 힘든 여러 구조적인 이유가 있어. 모든 결과에는 다 원인이 있는 법이니까. 그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지. 첫째로는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생물학적인 이유로 주체적이지 못해. 그건 사람이 매우 연약하게 태어나기 때문이지. 아기가 태어나면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밖에 없어. 아장아장 걷는 데만 거의 일 년이 걸리지. 하지만 초원에 사는 얼룩말 새끼는 이미 털이 다 난 상태로 태어나고 게다가 한 시간 안에 뛰어다닐 수 있어. 


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뇌의 차이 때문이야.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뇌가 성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하지만 인간은 뇌가 ‘미성숙’ 한 상태로 태어나지. 머나먼 옛날 그 언제부터인가 인간이 직립보행을 시작하면서 여성의 산도가 좁아져서 다른 동물들처럼 뇌가 성숙한 채 태어날 수가 없었어. 뇌가 성숙하면 그만큼 머리가 커질 텐데 그러면 좁아진 산도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산모와 아기 모두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인류는 그런 진화적 과정을 통해 미성숙된 뇌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거란다.


인류는 미성숙한 뇌를 가지고 태어난 덕분에(?)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갈 수 있었어. 미성숙한 뇌는 태어난 곳에서 적응하면서 새롭게 뇌로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지. 성숙된 뇌를 가진 동물은 환경이 급격히 다른 곳에서는 살 수가 없어. 예를 들어 얼룩말 새끼를 툰드라 제대로 옮겨 놓으면 그 얼룩말 새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은 어떤 새로운 환경에도 잘 적응하면서 뜨거운 아프리카에서부터 저 차갑고 추운 시베리아까지 삶의 영역을 넓힐 수가 있었단다. 


‘미성숙한 뇌’는 뛰어난 적응력을 갖는데 탁월한 장점을 가질 수 있었지만 단점도 많이 가지고 있지. 그중 하나가 ‘주체성’을 갖기가 어렵다는 점이야. 대부분의 동물들은 태어난 지 오래지 않아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살아가. 하지만 미성숙하게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부모의 극심한 보살핌을 받아야 살아갈 수가 있어. 타인의 보살핌이 있어야만 유아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보살피는 사람의 관심과 애정이 생존의 필수 요소이다 보니 자연스레 타인에 의존하는 성향을 갖게 된다. 아이는 부모가 원하는 행동을 할 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을 수 있음을 알게 돼. 그래서 아이는 본능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부모의 애정을 받기 위해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하게 되지. 그러다 보면 결국 부모의 욕망이 아이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자신을 돌봐주는 부모의 욕망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습관화가 된 이후에는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게 된다. 부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고 사회로부터 주입된 욕망을 또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게 되면서 인간은 ‘주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지. 그래서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 Jacques Lacan 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다.


앞 문단에서 인간은 사회로부터 욕망을 주입받는다고 했는데 그게 인간이 주체성을 확립하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란다. 사회는 주체적인 인간을 별로 원하지 않아.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야. 자본주의 사회에는 주체적인 인간보다는 ‘소비하는 노동자’ 더 원한다. 주체적인 세계관을 가지기보다는 주체적으로 ‘과소비’하기를 더 바라지. 노동자는 자신의 근무 시간에 만든 상품을 퇴근 후에 더 비싸게 산다. 노동자가 받은 임금은 주머니에 잠시 머물다가 자본의 이윤으로 회수되기 위해 다시 떠나간다. 이 순환이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핵심 원리이다. 데카르트가 현대에 다시 산다면 이렇게 말을 바꾸었을 것 같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산업혁명에 의해 시작되었고, 산업혁명은 간단히 말해 ‘공장의 탄생’을 말해. 공장이 탄생한 이후 대량으로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이 생산물들이 화폐경제와 만나면서 자본주의가 급격히 발달하게 되었어. 이 막대한 생산물들이 소비되어야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라는 두 바퀴를 굴리며 나아갈 수 있는 거란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서 소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큰 문제가 발생돼. 소비라는 바퀴가 빠지면 바로 무너지고 말지. 상품은 계속 쏟아지는데 소비가 되지 않으면 기업은 재고만 쌓이고 수익을 얻지 못하게 되어 기업은 파산하게 되고 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되어 그만큼의 소비자가 줄게 되고, 그러면 또 물건이 팔리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지. 그럴 때 발생되는 현상을 ‘경제대공황’이라고 해.


그 대표적인 현상이 1929년 미국에서 발생되었어. 그 당시 미국은 세계 경제를 이끄는 경제 선진국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가 1% 상류층에게만 쏠리는 불평등한 시대였고 경제 규모는 발전했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며 살아갔어. 노동자는 곧 소비자였기에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으로는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을 모두 소비할 수 없었고 결국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일어나고 누적되면서 대공황이 터지고 말았어.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에게 소비가 곧 미덕이라고 세뇌하는 거란다. 너도 잘 생각해 보면 하루 종일 알게 모르게 광고에 휩싸여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TV를 켜면 하루 종일 광고가 쏟아져 나오고 집 밖으로 나오면 온통 광고판에 둘러싸이게 되니까. 광고는 멀쩡한 물건을 '낡은 것'으로 만든다. 그 광고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야. “낡은 것을 버리고 신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너를 표현하라.” 이런 미끼를 물면서 인간은 소비하는 인간으로 길들여지게 되는 거란다. 그 소비를 위해 인간은 장시간의 원하지 않는 노동의 늪에 빠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주체적인 삶에서 멀어지게 되는 거지. 엄마가 드라마를 보다가 여주인공이 입은 옷을 보며 "저 옷 예쁘네~"라고 말했을 때 아빠는 이렇게 얘기했다. "여보, 자본주의의 미끼를 무셨군요." 물론 속으로 얘기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면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닌 '돈'이 될 수 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돈'을 사랑하게 된다. 돈의 가치는 인간의 관념에서만 존재해. 이 종이 안에 가치가 있다는 인간만의 약속이지. (모두가 동의한 약속은 아니지만) 인디언에게 돈과 먹을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돈을 선택하지 않는다. 물신숭배사회에서 물신을 믿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린다. 그래서 주체성을 확립하기 더욱더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하는 노동자로 길들이기 위해 생각하고 질문하는 법을 잘 가르치지 않아. 마케팅이란 다양한 기술을 사용해 전략적으로 유혹해서, 이유는 모르지만 그 상품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야. 결국 소비자들은 '필요한 것을 구매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도 소비해 자본주의의 잉여생산물을 떠맡는 사람'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지. 


자본주의는 유행을 만든다. 유행은 시간의 차이를 발생시키며 이는 차이의 욕망을 부추긴다. 사람들은 꼭 필요해서 구입하지 않고 과시하기 위해 소비한다. 부르디외는 이런 현상을 '구별 짓기'라고 말하였어. 인간은 왜 차이를 욕망할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크게 구별되지 않아서 차이를 욕망한다. 수컷 공작새처럼 구별된다면 굳이 구별되려는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까. 

 

욕망이 무조건 나쁘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야. 그 욕망을 내가 선택했는지 남에게 주입당했는지가 중요하지. 내 욕망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주체성이니까. 그럼 ‘진정한 나의 욕망’이란 무엇일까? 나중에 ‘욕망’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겠지만, 우선 욕망은 적을수록 좋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구나. 욕망은 절대 채워지지 않아. 욕망이 채워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 욕망은 다른 대상으로 변신하게 되지. 예를 들어 길을 가다 어느 옷가게에 전시되어 있는 예쁜 옷을 보게 되었고 그 옷을 갖고 싶어 졌어.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아 드디어 그 옷을 사게 되었을 때는 무척 행복하겠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예쁜(더 예쁜 건 대체로 더 비싸다) 옷이 눈에 띄고, 또 그 옷을 사기 위해 일을 하게 되고, 결국 그 옷을 사게 되었지만 이제는 다른 예쁜 가방을 갖고 싶어 지고… 이런 식으로 욕망은 그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 바뀜으로써 욕망을 이루기가 매우 어렵단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욕망을 버려야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부처님 같은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곤 욕망을 완전히 버리기는 어려워. 하지만 우리에게도’ 욕망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불필요한 지방과 몸무게를 덜어내야 하듯 불필요한 욕망도 덜어내는 게 중요하단다. 


우선 지금 나의 욕망이 내가 원하는 욕망인지 남이 원하는 욕망인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해. 하지만 구분하는 게 참으로 어려워. 그래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거란다. ‘성찰’이라는 필터를 통해 나도 모르게 내 삶에 붙어있는 ‘타인의 욕망’을 걸러내야 해. 특히 소비를 통해 얻는 욕망은 빨리 버리는 게 좋아. 소비를 통해 상품을 획득하여 얻는 욕망은 그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 바뀌기 되어 영원히 채울 수가 없어. 그리고 내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어야지 물건이 될 수는 없으니까. 


아빠도 한때는 돈 많이 벌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싶을 때가 있었지. 남보다 큰 집에 살고 싶었고 성능 좋은 자동차도 가지고 싶었어. 그래서 매일 늦게까지 일하고 휴일에도 일을 많이 했지. (그때 그렇게 일함으로써 너와 많이 못 놀아준 것을 많이 후회한단다) 하지만 늦게나마 그건 진정한 나의 욕망이 아님을 깨닫고 진정한 나의 욕망이 무엇일까 고민을 해보았다. 아빠의 진정한 욕망을 찾기 위해 ‘욕망 소거법’을 이용하여 욕망을 하나씩 버려 보았어. 그렇게 욕망을 하나씩 버리다 보니 끝내 버리지 못한 하나의 욕망이 있었어. 그건 ‘가족’이었다. 가족만큼은 버릴 수 없는 아빠의 마지막 욕망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사랑하는 내 딸에게 행여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쓰고 있는 거란다. 너도 이런 ‘욕망 소거법’을 통해 진정한 너의 욕망을 찾길 바란다.


유리병 입구에 입술을 대고 적당히 바람을 불어넣으면 소리가 증폭되는 현상을 들을 수 있어. 각각의 유리 병마다 고유 진동수라는 특정한 진동수가 존재하는데, 유리병 입구로 들어간 바람의 진동수가 유리병의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게 되면 유리병이 흔들리면서 소리를 내게 되지. 이런 현상을 '공명(共鳴)'이라고 해. 공명의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라디오가 있어. 특정 채널의 고유 진동수와 라디오 수신기의 고유 진동수가 일치하면 공명이 일어나서 그 채널의 신호만을 수신하게 되지. 하늘에 수많은 방송국의 전파가 떠돌고 있지만 내가 특정 채널을 골라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나의 라디오 수신기가 그 채널과 공명을 일으킨 까닭이다. 너의 주변에 수많은 욕망의 주파수가 있겠지만 너와 공명하는 욕망이 바로 너의 욕망이야. 너의 공명을 찾는 것이 네가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이고. 엄마, 아빠가 네가 어렸을 때 가급적 이것저것 많이 경험하게 한 것은 너의 공명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 <임제록>에 나오는 말이다.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야. 이 가르침은 아래와 같이 임제 스님의 파격적인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해탈하기 위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부처 같은 권위에 기대면 안 된다는 뜻이야. 내 마음에, 내 삶에 기준이 그 누구도 되어서도 안되며 그 누구의 권위에도 기대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그래야 타인의 욕망이 내 삶에 자리잡지 않고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란다.


“세상에 태어날 때 주체는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자크 라캉 Ecrits >


사랑하는 나의 딸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다음과 같이 성찰하길 바란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나 스스로 쓰고 있는가? 아니면 타인으로부터 쓰이고 있는가?” 

네 인생의 울림을 찾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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