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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Sep 11. 2022

행복, 나의 행복을 넘어서

모든 인간은 ‘행복’해 지려고 산다. 아빠도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살고, 사랑하는 내 딸의 인생이 ‘행복한 이야기’가 되길 늘 바란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서 행복이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정의되어 있어. 사전 상의 뜻은 하나이지만 생활에서의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방법은 모두에게 다르다. 내가 느끼는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의 행복을 남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래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행복의 종류도 다양하지. 다양한 행복 덕분에 이 사회는 이처럼 다채로울 수 있는 거란다.


행복의 종류는 다양하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특징이 있어. 그건 ‘좋은 느낌’이야. 이 좋은 느낌은 ‘쾌락’, ‘쾌감’이라는 뜻으로 상통될 수 있지.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행복=쾌락’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누적된 진화의 결과물들이야. 아메바 같은 작은 세균부터 인간에 이르는 모든 생명은 ‘쾌-불쾌’의 신호에 따라 움직인다고 볼 수 있어. 아메바는 먹을 것이 있거나 살기 좋은 곳이 있으면 다가가고, 먹을 것도 없고 살기 어려운 곳은 피해 가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도 마찬가지로 좋은 느낌이 드는 행동은 반복하며 불쾌한 느낌이 드는 행동은 피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 비유를 들자면 ‘쾌=파란 신호등’, ‘불쾌=빨간 신호등’이라고 볼 수 있지. 인간에게 그 신호등의 역할을 하는 것이 ‘감정’이야. (감정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도록 할게). 이렇듯 파란 신호등을 따라갈 때 느끼는 좋은 감정을 ‘행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럼 이 ‘행복’이라는 파란 신호등을 따라가면 무엇이 있을까? 그 목적지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소명이 기다리고 있어. 즉, ‘가족’이다. 가족이 바로 생물학적 소명이야. 생명이란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명령이며 그 목적의 실현이 ‘가족’이라 할 수 있어. “잘 살아남아서 가족을 이루거라” 꾸밈없이 핵심만 말한다면 ‘생존과 번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아빠도 아빠에게 주어진 파란 신호등을 따라가다 보니 엄마를 만났고 (그 과정은 매우 험난했지만), 다시 엄마와 같이 파란 신호등을 따라가다 보니 너를 만나 우린 가족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엄마 아빠의 유전자는 너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가족을 이루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이미지는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SNS에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사진을 올리는 이유이기도 하지. 


행복은 각자만의 파랑새를 찾아가는 여행이야. 하지만 이 행복의 여행에서 상호 간의 갈등이 생길 수 있어. 마치 인기 있는 여행지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불편한 것처럼 말이야.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행복에 대한 욕망은 무한하고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 간의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의 개인적인 행복을 넘어 사회적 행복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행복의 병목 현상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딜레마를 잘 풀어내는 사회가 성숙한 선진 사회라고 볼 수 있어.


사회적 행복에 앞서 개인적 행복에 대해 먼저 고찰해 보자. 개인적 행복은 ‘쾌락’이라는 감정과 상관관계가 많아. 쾌락은 즐겁고 좋은 감정이지만, 쾌락에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된다. 예를 들자면 한 번 먹은 초콜릿은 맛있지만 계속해서 초콜릿을 먹는다면 점점 맛있는 쾌감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어. 만약 삼시세끼 초콜릿만 먹으라고 하면 그건 고문이 될 거야. 집, 자동차, 가전제품 등을 소비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무엇을 소비하며 얻는 행복의 쾌감은 초콜릿을 먹을수록 맛이 떨어지는 것처럼 채워질 수 없지. 


이렇게 채울 수 없는 욕망은 떨어진 쾌감의 강도를 높이려고 하고, 이것은 곧 중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자동차로 예로 들자면 아반떼를 타면, 쏘나타가 타고 싶고, 쏘나타를 타면 그랜져가 타고 싶고… 하지만 강도를 높여도 욕망은 다른 욕망으로 변형될 뿐 채워지지가 않아. 내가 쏘나타를 타서 행복했는데 옆 집에서 그랜져를 타고 지나가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그새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야.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는 자꾸 누군가와 비교해서 더 좋고 멋진 상품으로 바꾸라고 유혹하지. 그래서 남들보다 더 좋은 상품을 가지는 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그래서 돈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본주의에서는 행복이 변질되어 간다. 남 부럽지 않게 부유한 사람들이 간혹 마약 등 강렬한 쾌감에 중독되는 현상을 보면 많이 가진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리고, 쾌감은 쉽게 망각된다. 역설적이게도 쾌감의 망각이 생명들을 계속 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 아주 먼 옛날 어느 원시인이 사냥에 성공하여 맛있는 고기를 먹고 행복한 하루를 보냈어. 그 원시인이 내일 또 사냥을 하기 위해선 필요조건이 하나 있어. 그건 어제 고기를 맛있게 먹었던 쾌감이 사라져야 해.  쾌감의 수준이 원점으로 돌아가야 다시 그 쾌감을 느끼기 위해 동굴 밖에 나와 사냥을 다시 시작하게 할 동기가 생기게 되지. 이 쾌감이 망각되지 않으면 다시 사냥할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고 동굴 안에서 마냥 있다가 다시는 동굴 밖을 나오지 않게 되어 결국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지 못하게 되겠지.

 

그래서 상품의 획득으로 본질적인 행복을 얻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상품을 소비하여 느꼈던 쾌감이 곧 망각되기 때문이야. 그리고 물건을 얻어 느낀 행복은 곧 절망으로 바뀌게 된다. 내가 가방이 마음에 들어서 샀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내 것보다 더 좋고 비싼 가방을 들고 다니기 때문이지. 물건의 소비는 경험 소비와는 달리 결과물이 남기 때문에 늘 남의 물건과 객관적으로 비교를 하게 된다. (비교는 가장 빨리 불행해지는 비결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상품화시킴으로써 인간관계를 상품 간의 관계로 전락시킨다. 상품으로써의 인간은 윤리와 사랑에 따라 관계를 맺기보다는 상품 관계의 윤리, 즉 등가 교환의 원칙에 따라 인간관계를 맺게 된다. 월거지, 전거지, 빌거지, 이백충, 삼백충 등의 신조어가 생기는 이유도 이런 등가 교환에 따르기 때문이야. 그래서 부유한 동네 아이와 가난한 동네의 아이가 친구가 되기 어려운 이유이다. 


하지만 쾌락주의 행복은 자본주의와 너무 궁합이 잘 맞아서 우린 소비를 통한 쾌감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자본주의에 포획되어 소비하는 노동자로 길들여져 열심히 자본주의의 쳇바퀴를 돌리며 자본주의 사회에 에너지를 공급하게 된다. 마치 매트릭스 안의 인간 전지처럼 말이야.


그래서 자본주의가 주는 행복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어. 행복이란 순간적인 쾌감이 아닌 ‘지속적인 무엇’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내 영혼이 갈망하는 행복은 스쳐 지나가는 덧없는 순간들이 아니라, 유일하고 지속되는 상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어. 감정의 관점에서 행복을 바라본다면, 행복은 쾌의 감정보다는 만족의 감정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지. 쾌의 감정보다 만족의 감정의 지속 시간이 훨씬 더 길게 유지되기 때문이야. 만일 쾌락주의 행복론이 옳다면 동물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어. 그러면 마약 중독자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어야 하겠지. 하지만 마약 중독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속적인 만족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2천 년 전에 주어졌어.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했고 석가모니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공동체와 타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통해 지속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어. 부유한 마약 중독자보다 몸소 사랑을 실천하신 고 이태석 신부 같은 분이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태석 신부가 느낀 쾌감의 총량은 부유한 마약중독자에게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 만족감의 총량은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충만하다. 


주관적 행복인 ‘쾌락’을 생물학적 관점으로 설명하였듯이 사회적 행복을 통한 만족감도 같은 관점으로 고찰해 보겠다. 아주 먼 옛날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 생활을 했다. 사자 같은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코끼리 같은 강력한 피지컬도 보유하지 못한 인간은 무리 생활이 필수였다. 주변엔 포식자들이 우굴거렸고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모여 살았다. 초원의 얼룩말들이 무리를 지어 사는 것도 같은 이치 때문이야.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한 마리보다는 열 마리의 무리가, 열 마리보다는 백 마리의 무리가 생존 확률을 더 높여주기 때문이지.


무리 생활을 하던 어느 한 호모 사피엔스가 들소 사냥에 성공했다. 그 사냥꾼은 그 들소를 숨겨놓고 혼자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 사냥물을 무리와 함께 나눠 먹는다면 혼자 먹었을 때보다 훨씬 큰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무리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기 때문이지. 무리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곧 나의 생존과 번식의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이야. (옆 동굴에 사는 루시에게 호감을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구성원들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 본능적으로 큰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간관계’에 목숨을 건다. 무리에서 쫓겨나는 것은 바로 ‘죽음’, 곧 나의 유전자를 남길 수 없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인간이 느끼는 모든 기쁨과 슬픔은 모두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인간의 뇌는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 발달했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많아. 그래서인지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더 아들러는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의 문제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행복은 개인적인 쾌감의 총량이기도 하며, 서로 양보하며 조율해야 할 공공재이기도 하다. 행복의 정의와 방법은 각자 다르기에 상호 간 조율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행복은 쉽지 않아.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지금까지 모든 철학자가 각자의 행복론을 주장했고 지금도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계속 출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프롬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그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어.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처럼 사람들을 제한된 공간에 가둬 놓고 서로 경쟁해서 최후에 살아남는 한 사람에게만 엄청난 상금을 준다면, 사람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의 원인은 개인에게 있을까 아니면 사회 구조에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질문해 볼 수도 있다. 행복한 개인들이 모이면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일까?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그 구성원들이 행복해지는 것일까? 얼핏 생각해 보면 당연히 행복한 사람들이 모이면 행복한 사회가 될 것 같지만 이 견해에는 맹점이 숨어 있다. 바로 ‘경쟁’이 생긴다는 점이야.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자원은 유한하기 때문에 경쟁이 발생되는 것을 피할 수 없어. 마치 의자놀이처럼 말이야. 의자놀이는 다 같이 즐겁게 춤을 추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은 누군가는 의자에 앉지 못하고 탈락하게 되어 불행해진다. 또 의자에 앉은 사람도 다음 기회에는 탈락할 수 있기에 역시 늘 불안하게 된다.  


사회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은 항상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모든 생명들이 환경에 따라 진화하듯이, 사회 구성원들도 그 사회 구조에 따라 적응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적응된 생각과 행동들이 우리의 문화를 만든다.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차이점은 생물학적 진화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사회적 문화는 우리가 선택해서 만들 수 있다는 점이야. 의자를 굳이 크게 만들어서 탈락하는 사람이 생기게 하는 것보다 다소  작더라고 모두가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만들 수 있음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야.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불행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불행의 원인이 반민중적인 사회 구조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큰 강이 깨끗해야 작은 개울들이 깨끗할 수 있는 것처럼 사회가 평화롭고 평등해야 가정과 같은 작은 공동체나 개인 간의 관계가 평화로울 수 있다. 


지금 ‘행복 열풍’이 불고 있다. 욜로, 소확행, 워라밸, 라곰, 오캄 등 행복의 별칭도 많아지고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늘 행복에 관한 책이 빠지지 않아. 어쩌면 그만큼 이 사회가 행복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지. 정의가 부재하여 정의를 갈망하는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처럼 말이야. 북유럽에 사는 사람이 한국 사람보다 더 행복한 이유는 복지 사회, 즉 환경 때문이다.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주택, 기본소득 등의 복지 제도가 필요하다. 이런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하고. 이런 논쟁은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어. 하기만 이런 불편을 넘어야 불안하지 않는 사회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 수 있다.


쉽게 떠오르는 행복의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의 SNS에 올린 사진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나의 가족을 넘어 이웃들과 같이 밥을 나누어 먹는 장면은 그보다 더 큰 행복을 주지 않을까?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달성하는 것은 너무 먼 길일 수도 있어. 하지만 목적이 뚜렷하면 어두운 밤바다일지라도 등대의 불빛을 따라 두려워하지 않고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등대가 되어 사회, 이런 사회가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해 줄거라 확신한다.


멀고도 먼 길을 지치지 않고 같이 가는 방법이 있다. 내 밥그릇을 조금 덜어내어 이웃과 함께 나눠 먹으며 나아가는 것이라도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너는 누군가의 등대가 되어 주는 삶을 살길 바란다. 나의 딸의 인생 이야기는 개인의 행복을 넘어 ‘타인과 함께 행복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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