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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Sep 25. 2022

사유, 인생의 나침반

인생을 ‘항해’와 비유하곤 한다. 세상이란 바다 위에 ‘나’라는 배를 띄워 놓고 나의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이 인생이라 할 수 있지. 요즘에는 요트를 타고 한가로이 바다 위를 여행하기도 하지만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배를 타고 바다를 나가는 일은 목숨을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어. 풍랑과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는 해양사고도 많았고 바다에는 늘 해적이 도사리고 있었지. 게다가 항해 기간이 길어지면 선원들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18세기 영국 군의관 제임스 린드에 의해 비타민C가 결핍되어 괴혈병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고대 시대에는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알 수 없어 원거리 항해는 불가능했었어.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에는 해와 별을 관측하여 방향을 알 수 있었지만 상당한 전문 지식과 관측 시간이 필요했고 흐린 날이나 안개가 낀 날에는 별 소용이 없었지. 나침반의 발명으로 인해 비로소 대양으로의 항해가 가능했어. (비타민C와 함께) 나침반이 없었으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세계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거야.

  

현대 사회를 정보의 바다에 비유하곤 한다. 과거에는 신문, 방송 등에만 국한되었던 미디어 정보들이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정보의 양이 늘어났어. 예전에는 피디, 기자 등 특정 직업 군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정보를 취급했다면 요즈음 유튜브 등 일반인들도 정보를 생산, 유통하고 있지. 그래서 현대 사회는 각종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로 인해 정보의 홍수를 넘어 정보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 유용한 정보도 많지만 암초같이 해악 한 정보도 많아. 이러한 정보의 바다에서 삶의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유(思惟)’이다.


사유란 생각의 힘이야. 현재 나에게 습득된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나도 모르게 사회화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어. 가족, 학교, 사회생활 등을 통해 타인의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습득된 것이지. 너의 생각은 정말 너만의 생각일까? 너의 욕망은 진정한 너의 욕망일까? 


프랑스 정신의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어. 라캉은 이 세상을 구조화되고 기호화된 세계라고 보았지. 출생과 더불어 주민번호라는 기호와 이름이라는 상징을 부여받으며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교육은 어쩌면 타인에게 구조화된 사회적 기호와 상징을 물려받는 것일지도 몰라. 가족 내에서는 말 잘 듣는 자식,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 사회에서는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 성공이라는 식으로 말이야. 이 세계에서는 주민등록증, 학생증, 사원증, 은행 계좌 번호 같은 사회적 표식이 없으면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나비는 번데기의 껍질을 뚫고 나와야 성충이 될 수 있어. 곤충의 일생에서 나비와 같이 번데기 과정을 거치는 경우를 완전 탈바꿈이라 하고, 매미, 잠자리 같이 번데기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경우를 불완전 탈바꿈이라고 한다.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J. J. Rousseau)는 그의 저서 에밀(Emile)에서 "우리는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생존하기 위해서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생활하기 위해서 태어난다."라고 말했어. 첫 번째 탄생은 육체적 탄생을 말하고, 두 번째 탄생은 자각하는 정신적 탄생을 뜻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나비처럼 번데기를 뚫고 나오는 두 번째의 탄생을 거쳐야 해.  제2의 탄생을 거치지 않으면 타인의 생각으로 둘러싸인 번데기 안에서 나올 수 없게 되고 나만의 주체성을 확립할 수 없게 된다.

 

18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르키 드 콩도르세 Marquis de Condorcet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어. 생각하는 사람만이 성찰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고 그저 남의 생각을 믿는 사람은 생각의 노예로서 밖에 살아갈 수 없는 것이지. 여기서의 남의 생각이란 자비로운 나의 이웃의 생각이기보다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생각일 확률이 매우 높다. 현대 사회의 권력은 자본가의 것이기에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대중들이 별생각 없이 그저 ‘소비하는 노동자’가 되는 것뿐이란다.

 

실크 만드는 공장의 주인은 누에가 고치를 뚫고 자유를 찾아 날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누에가 나방이 되면 고치가 망가져 실의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누에고치는 그대로 삶아져 실만 공급할 뿐이야. 자본가들도 노동자들이 사유하며 자유롭게 날아가는 나비가 되기보다는 그저 말 잘 듣는 부속품 같은 고치가 되길 바랄 뿐이다. 나에 대한 성찰이 제2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나만의 생각을 다시 얻게 거란다. 진정한 자유인,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유와 성찰이라는 나침반이 필요한 이유이지.


현대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정보가 미디어를 통해 생산, 유통된다. 신문, 방송, 인터넷을 통해 매우 저렴하게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하지만 여기에 맹점이 숨어 있다. 미디어가 판매하는 상품이 시청자이고, 그 상품을 구매하는 고객은 기업이다. 기업은 시청률을 사고, 미디어는 시청자를 기업에 판매하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미디어의 권력을 흔드는 것은 기업이라고 할 수 있어. 미디어는 편집과 순서의 배열 등 기술적인 방법을 통해서 권력자의 이념을 대중에게 전달한다. 20세기 미국의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는 '신문과 방송이 광고주인 사기업의 이익을 대변해 주고, 사기업들은 광고로 언론의 이익을 보장함으로써, 잘못된 이익의 먹이사슬이 형성됐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미디어의 한계를 지적했지. 대부분의 대중은 의외로 자신의 이익과 권리에 대해 의외로 무관심해. 대중은 매우 치밀한 미디어의 영향을 받으며, 사유의 번거로움을 포기하고, 모든 평가와 판단을 권력에게 양도한다. 


무지와 무관심은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득권이 아무 저항 없이 유지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대중은 기득권을 선망하고 그들의 언어에 잘 현혹되고 오히려 그들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어. 그리하여 기득권 체제는 지속되며 사회 안에서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게 되는 것이지. 사유하지 않으면 역사는 멈춘다. 길고 긴 암흑의 중세를 끝낸 것의 소수들의 끊임없는 사유의 누적이었어. 역사는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왕과 소수의 귀족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근대 이후 혁명의 시대를 거치면서 민중들에게도 자유는 확대되었다. 고치에서 벗어난 나비들이 늘어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했어. 사회 안에서 주체적인 자아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과 사회를 잘 알아야 한다는 뜻이야. 인간과 사회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을 ‘인문학’이라고 한다. 인문학의 사전 상의 정의는 “인간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나 사상, 문화 등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자연과학이 객관적인 자연현상을 다루는 학문인 것에 반해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와 관련된 제반 문제를 연구의 영역으로 삼는다. 소위 말하는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 여기에 속하지.


중세시대에는 출생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이 정해졌어. 농노로 태어났다면 평생 성직자와 귀족을 위해 노동과 헌신을 바쳐야 하고 신앙을 통한 내세의 구원을 받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받았어. 하지만 근대 이후 신분제도가 철폐된 이후에는 ‘자유’가 주어짐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야만 했지.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러한 상황을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그저 태어났으며, 세상에 던져진 존재자일 뿐이라는 것이야.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은 없으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했지. 신분 사회와 달리 현대 사회는 미리 주어진 역할이 없어. 그래서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매번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돼. 하지만 선택은 어렵다. 정답이 없기에, 인간에게 주어진 목적이나 기능이 없기에, 그래서 인간은 늘 불안하다. 하지만 선택에서 가치가 나오는 법이다. 인간은 선택을 하며 자신을 계속 미래로 던져야 한다. 나의 사유로 나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며 실존해야 하는 것이지. 이를 철학에서는 ‘실존주의’라 한다.


산업혁명 이후 공장의 탄생으로 인해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어. 공장에서 상품이 쏟아져 나오니까. 모두들 이러한 풍요가 인류에게 행복을 안겨 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풍요로워도 돈이 없으면 그 어떠한 것도 가질 수가 없어. 자유는 주어졌지만 가진 자들의 '소비할 자유'만 있을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고 신분제도는 없어졌지만 가진 소유물의 총량으로 순서를 정하는 서열 사회가 되었어. 그리고 과도한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 인해 지구온난화 문제가 발생되었고 현재는 인류는 존폐의 기로에 서있게 되었다. 풍요로워졌는데 왜 행복하지 않는가? 인문학이 필요한 두 번째 질문이야.


신분 사회는 폐지되어 계급은 없어졌지만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서열화되었다. 이제는 모든 국민들은 가진 것 순서대로 순위를 정할 수가 있게 되었어. 봉건시대보다 더 복잡한 다층적 위계 사회가 되어 버린 셈이지. 학교도 서열화, 직장도 서열화, 행복도 가진 것의 순서에 따라 서열화가 되었다. 인문학은 사유하고 토론하는 학문이야.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사유하고 토론하는 공부를 가르치지 않는다.(아빠 학교 다닐 때는 더 심했다) 사유하고 토론해서는 일등부터 꼴등까지 서열화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래서 서열화 사회에 맞도록 서열화된 교육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유와 논리의 학문인 인문학이 암기 과목으로 둔갑되었어. 예를 들어 자연권에 대해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음 보기 중에 자연권이 아닌 것을 고르라는 식이 되었지. 그렇게 서열을 높이지 위해 암기만 반복하면서 서서히 비판 능력을 잃어가게 된다. 정신적 사유가 사라진 자리에는 대신 물질적 비교가 차지하게 되었어.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경쟁을 하게 돼. 그저 남들보다 많이 가지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지. 


논어 자로 편에 “자왈 군자 화이부동, 소인 동이불화(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화(和)하되 동(同) 하지 않지만, 소인은 동(同)하되 화(和) 하지 않는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화합, 어울림을 추구하되 획일적인 같음을 요구하지 않지만, 소인은 획일적으로 자기와 같은 것만을 요구, 서로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소인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차별한다. 이런 이중성은 남에 비해 자기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려는 노예근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노예는 사유가 부족하기에 소유한 물건으로 남보다 우월하려고 애쓴다. 타인과 물건의 소유를 경쟁하는 것을 지양하고 어제의 나보다 성숙된 오늘의 나, 오늘의 나보다 더 성숙된 내일의 나를 만드는 것을 ‘성찰’이라고 한다. 타인과의 비교보다 어제의 나 자신과의 성찰만이 성숙한 사회로 만들어 갈 수 있어.

 

레 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 Victor-Marie Hugo는 나침반을 배의 영혼이라고 했어. 사유가 없는 인생은 나침반 없는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지.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사유가 없으면 우리의 인생은 항해가 아니라 그저 표류할 뿐인 것이다.


내 인생의 나침반, 사유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질문’이다. ‘코기토 에르고 줌(Cogito, ergo sum)’. 이 회의하고 질문하는 힘이 누적되어 중세의 막을 내리고 근대를 열게 하였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 편지에서 이야기해 보겠다. 사랑하는 딸, 멋진 사유의 나침반을 얻기 위해 항상 열심히 독서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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