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약가 Feb 16. 2023

EP1. 결핍과 상처는 감출 수 없다.

회피형의 연애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을 채워가기 위한 욕구를 에너지로 삼아 살아간다.


너희 언제까지 생일 때마다 분식집 모여서 떡볶이나 먹을거야? 일 안할거야?

벌써 알고지낸지 10년이 넘어간 5명의 그룹이 생일이라고 모인 저녁 자리에서 한 녀석이 말했다.

너무나 맞는 말이라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벌써 30이 다 되어가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아직 취업을 못했고, 누구는 몇 년 째 공무원 시험 준비라는 명목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을 다니고 있는 사람은 나와 저 녀석뿐이었다.


우리가 20살 초반이었을 때, 모두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처음 왔던 이 곳이었는데 어느순간부터 자연스레 이 곳은 생일이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그때는 그래도 떡볶이 무한 리필이라는 조건이 더해진 특별한 날의 장소였었는데 말이다.


나름 우리들만의 소소한 추억이 고이고이 간직 된 전통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취업을 못해 제 앞가림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이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 날, 늘 곁에서 지켜보는 친구로서 답답한 마음에 누군가의 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은 조금 쓴 소리를 뱉고 말았다.


나는 이 친구를 잘 알고있다. 사실 저 말은 이 친구들을 걱정하며 뱉은 답답함 보다는 자신이 이루어 낸 것들에 대한 인정을 바라는 말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 친구에 대한 험담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친구를 잘 안다는 것은 이 친구가 뱉은 저 말에 내포된 의미와 왜 저 말을 했는지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갈등과 그로인해 자신이 겪어왔던 힘듦 속에서 스스로가 지녔을 무능력함과 자책을 극복해보고자 일찍부터 일을 시작해 또래에 비해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분명 옆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도 열심히 살았다 싶을 만큼 많은 노력을 해 왔던 친구였다.  


노력과 인내는 마땅한 보상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이 친구가 너희는 일 안할거야?, 라며 뱉은 말은 다른 친구들을 위한 걱정보다는 ‘나 봐’ 라며 이 녀석이 해온 노력과 인내 그리고 그 결실을 저녁 식탁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이거 보고 느끼는 거 없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내게도 지독한 결핍이 하나 있다. 타인의 챙김과 보살핌이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때마다 누군가는 정말 부모님이라는 존재없이 혹은 신체적 학대를 가하는 부모가 있었을텐데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조금 든다.

먹을 거 입을 거 뭐 하나 부족함 없이 채워주신 부모님이었지만 부모님으로 인한 분명한 상처가 있었고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가족들과 거리를 벌렸다.


부모님께 내 힘듦을 터놓고 호소할 때면 돌아오는 반응은 거진 비슷했다.


“좀 참아줄 수 없겠니?. 엄마 많이 아파. 아픈데 참고 사는거야. 그거 좀 못참아?”

“미안하다. 못난 부모 만나서 힘들게만 하고, 해줄 건 다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부디 다음 생에는 좋은 부모 만나길 바래”


그랬구나, 라며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랬던 것이었는데 오히려 내가 좀 더 인내하고 부모님을 이해해주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렇게 쌓여온 힘들면 안되고 어디가서 털어두어서도 안된다는 생각은 서서히 힘이 풀려 이윽고 나도 챙김 받고 위로 받고 싶다는 결핍으로 자리잡혀갔다. 누군가 이 결핍을 채워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갔다.  






미안한데 나 지금 좀 버거워. 시간 좀 가질까?

연인과 가까워질 때쯤 내가 늘 했던 말이다. 누군가 내게 가까워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서로 다투거나 상대가 내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등 부정적인 감정을 뱉을 때면 나는 온갖 이유를 대며

그 상황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내가 요즘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힘들어. 나중에 얘기하면 안될까?"


이 여자는 내가 원했던 챙김과 보살핌에 대한 결핍을 채워 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며, 오히려 내가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관계라고 보여졌다.


연애란 곧 감정을 나누는 관계인데, 내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방도 내게 감정을 표현하는 상호작용에 대한 경험의 부재로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더 이상 사랑스러운 연인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줄 수 없었던 부모님의 감정으로만 보였다. 부모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투영되었던 것이다.

내게 있어 사랑이란 완벽한 하나됨을 떠올리게 했다. 원래 하나였는데 쪼개진 둥근 원의 반쪽 두개가 마침내 완벽한 하나의 원형을 이루어내듯, 같은 모양과 같은 크기로 합쳐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 안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은 없다. 하나가 되었기에 그 반쪽은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조차 해줄 수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비워진 마음의 공간을 완벽하게 매꾸고자 하는 욕구는 너무나 강했다. 


수 많은 연애속에서 이러한 감정은 거듭 반복 되었다. 미숙한 남녀 둘이 만나 서로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받아들이고 마주한다는 것은 꽤나 버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 버거움이 한계치에 달했을 때, 이미 내게 마음이 많이 열린 상대방을 끊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남긴 채 이제는 내 아픔을 돌보고자 그리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같은 상처를 안겨주지 않고자 상담을 받아보기로 결심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