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의 연애
첫 화
저 지금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을까요?
조심스레 상담 선생님께 여쭈었다.
어느덧 상담을 받은 지 3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요?”
“아뇨, 그건 아닌데. 혹시나 앞으로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요”
“그럼요. 지금은 누군가를 만나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요. 대신, 그런 사람이 생기면 제게도 알려줄 수 있어요?”
"네, 그렇게 할게요"
아직 나 자신은 스스로에게 새로운 시작을 해도 괜찮다는 말을 해줄만큼 확신이 없었다.
누군가로부터 괜찮다, 해도 된다는 말을 들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가을, 전주로의 4박 5일 출장에서였다. 오래전부터 기획해 왔던 대규모 국제행사가 전주에서 치러졌다. 많은 국내외 인사들과 참가자들이 찾아오는 행사이기에 그만큼 해야 할 업무도 많았고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않으면 실수하나 나오기 쉬운 상황이었다.
행사 첫날, 행사의 주최 측 사무실로 찾아가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주최 측을 돕는 협력업체로서 이 행사를 참여하고 있었다. 서로 바쁘고 거리도 있다 보니 늘 줌을 통해서만 대화를 나누었는데,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긴 시간 준비하신다고 고생 많으셨어요. 저희도 동원 가능한 인력이 많이 없어서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전주시에서 자원봉사자들을 많이 모아주셔서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주최 측 담당 팀장님이 인자하신 미소로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러면서 나와 같이 일해줄 3명의 남녀직원을 소개해주셨고 그녀는 거기서 처음 만났다.
저분들이 전주시에서 모집해 준 자원봉사자겠구나.
한숨-
그러나 사실 그녀를 보았을 때 내 첫 반응은 그저 한 숨뿐이었다.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는데 일 잘하는 경력자를 붙여줘도 모자랄 판에 웬 고등학생들을 데려와주면 괜히 더 정신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은 걱정이 앞섰다. 실제 저분들의 나이가 몇 인지는 아직 인사를 나눠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눈엔 고등학생, 많이 쳐줘야 20살 초반으로 보였다.
낯가림이 심해 눈도 잘 못 마주치며 부끄러워하는 3명에 대한 첫인상은 그러했다.
자, 다 기억하시겠어요?
그녀를 포함한 3명에게 자기소개도 없이 급한 마음에 내가 알고 있는 업무내용을 알려주었다. 물론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어, 최대한 내가 없더라도 일이 돌아갈 수 있게끔만 알려주었다. 역시나 낯가림 탓인지 그녀를 포함한 3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뿐이었다.
이때만 해도 호감이라는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5일간의 긴 여정 중 이제 막 첫째 날이 시작되고 있었으니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들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고, 매일매일 해야 하는 일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덩이 떡이야” (그런데 나는 이걸 복숭아떡으로 알아들었다)
바쁘게 일하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은 내게 차장님이 간식이라도 하라며 떡 하나를 쥐어주었다.
“복숭아 떡이래요. 드셔 보셨어요?”
행사장 복도 테이블에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고 있던 그녀에게 차장님이 주신 떡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계속 같이 붙어있으며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오며 가며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나처럼 일당을 받는 것도 아닐 텐데 밤낮 할 것 없이 열심히 하는 모습에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 듯싶어 조금씩 눈길이 갔다.
행사도 어느덧 3일 차를 지나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었기에 여유롭게 말을 걸어볼 수가 있었다.
이때쯤부터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혼자 뚝딱 거리기 시작한 것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업무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는 전혀 문제없었는데 이제 서서히 업무와 무관한 이야기를 해나가려고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지금 조금 어색하게 서있지는 않는지 나 자신에게서 어색함을 잔뜩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 어색한 뚝딱거림을 맛본 뒤부터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계속 그녀 생각이 났다. 나 자신에게는 납득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외적으로는 내 이상형과 정반대의 외모이지 않은가. 어디에서 괜찮음을 느껴 계속 생각나는 것일까? 게다가 그녀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사실 아직 이름도 나이도 정확히 모르지만 나는 그럴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4일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나는 번호를 물어보지 않으면 정말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어디가 좋은지 왜 좋은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 끌림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괜히 물어봤다가 거절해버리면 내일 서로 어색해질 수 있으니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고 내일 물어보자,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 대리님이요? 어제 급한 일 생기셔서 먼저 복귀하셨어요”
그녀와 함께 일하던 다른 자원봉사자들이 대답했다. 대답을 듣고 한동안 아무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그 친구들을 바라만 보았다.
“그럼, 이제 다시 안 돌아오시는 거죠? 아니, 그보다... 대리님이요?” 너무 궁금한게 많았지만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을 숨긴채 묻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놀라움은 끝이 없었다. 그녀는 사실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다른 2명의 자원봉사자들을 통솔하는 주최 측 회사의 대리였으며 심지어 나이도 고등학생이 아니라 나와 동갑이었다. 고등학생이면 어쩌지 싶은 나의 걱정과 마지막날에 번호라도 물어봐야지, 했던 계획은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그분 번호 혹시 가지고 계세요?” 양측 회사의 관계나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그러한 걱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이 순간 나는 내 마음이 강하게 원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쉬움이 분명 크게 남을 것이다. 이건 분명했다.
번호를 받아 바로 카톡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첫날에 잠깐 인사드렸던 ㅇㅇㅇ입니다. 이번 행사 준비하시느라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만나 뵙고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어제 올라가셨다고 들어서 이렇게 문자로 인사드리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