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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약가 Feb 19. 2023

EP4. 고백 - 깨고 싶은 징크스

회피형의 연애

첫 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내일 시간 돼?

그녀와의 4번째 만남은 퇴근 후 상수역의 한 피자 가게에서 였다. 오늘 마침 오전에 외근이 있었어서 어쩌다 보니 나는 정장 차림으로 오게 되었다. 멋스럽게 입은 옷 덕에 묘한 자신감이 붙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것은 나였다. 갑작스레 생긴 추가 업무탓에 아직 퇴근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게다가 어제부터 몸살이 심해서 업무에 속도가 나지 않는다며 힘들어 했다.


-몸이 안 좋으면 퇴근하고 다음에 봐도…

라고 카톡에 글을 써보다가 모두 지우고 다시 고쳐 썼다.


-그래 천천히 와~


오늘은 4주 간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친구로서 주고받은 연락에서 이제는 다정한 연인으로서의 

대화를 시작해보고 싶었다. 가끔은 오글거려도 좋으니 낯간지러운 대화도 해보고 싶었다.

아픈데 뭘 챙겨주면 도움이 좀 될까, 하는 고민도 해보며 지금은 부담이 될까 조심스러웠던 행동들도 해주고 보다 더 가까이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언제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이다.


여기서 밥을 다 먹고 하는 것이 좋을까? 다 먹고 나가서 하는 것이 좋을까? 어떤 말로 해야 담백하게 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하다 보니 그녀가 어느새 테이블 앞까지 와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대화는 재밌게 흘러갔다. 우리 둘 다 장난기도 많고 대화 스타일도 잘 맞아서 첫 만남 때와는 달리 오디오가 빌 틈이 없었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화는 그녀의 전 애인에 대한 이야기에 다다랐다.


“저는 남자친구가 생기면 모든 관심과 집중이 다 그쪽으로 쏠리거든요. 정말 푹 빠져 살아요. 다 챙겨주고 하나부터 열까지 맞춰주기도 해요. 그런데 전에 만났던 분한테는 제가 많이 서운했었어요. 나만 신경 쓰는 것 같고, 나만 열심히 이어 가는 관계 같았어요. 내가 신경 써주는 만큼 상대도 내게 마음 써줬으면 하는 그런 게 있었죠. 그 외에도 이것저것 더 있지만”


“그렇죠, 내가 해주는 것만큼 똑같이 해주지는 않더라도 내가 계속 챙겨줄 수 있게 내가 챙겨주고 배려해 주는 걸 알아만 줘도 지치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 둘 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챙겨주는 걸 좋아하며 그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힘을 얻는 성향이다 보니 그녀가 어디서 서운했는지 무엇을 바랐을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관계를 이어나가는 태도와 타인에게 바라는 기대 그리고 챙기는 마음 등에서 우리는 비슷한 점을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서로의 손가락을 가볍게 터치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가 끝나고서야 손 끝으로 온 신경이 쏠렸다. 나는 검지로 조약돌같이 맨들맨들한 그녀의 네일을 만지고 있었고, 그녀도 내 손가락을 가볍게 톡톡 치고 있었다. 






여자 소개받을래? 진짜 예뻐!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필라테스 강사라며 사진을 보여주고는 내게 물었다.

“내가 웬만하면 소개 안 시켜주는데 너는 내가 봐도 괜찮은 사람이라 소개해주고 싶어서 그래”


“아 부끄럽네, 그런데 나 여자친구 있어”


아직 그녀와는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가 아니지만 확신이 있었다. 그간 나눠온 대화와 우리가 알고 지냈던 시간 그리고 서로에게 쏟는 노력 등을 통해 이 관계는 회사 거래처에서 친구로 넘어가 결국 연인으로 마무리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었다.


예전부터 내게는 고약한 징크스가 있었다. 누군가와 아직 썸이라는 관계 일 때, 즉 사귀기 전에 주변 친구들에게 이 관계에 대해 말하면 그 관계는 결국 잘 안 풀리게 되는 징크스였다. 통계적으로 보았을 때 그러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훗날, 고백하기 전 친구들에게 확신에 찬 나머지 곧 연애할 것 같다며 그녀에 대해 얘기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그녀가 말을 이어가기 전 내 손을 꼭 잡으며 얘기했다. 고백한 장소는 식당도 거리도 아닌 지하철 개찰구 앞이었다. 미루고 미루다 그녀가 표를 찍고 들어가려는 순간, 하루종일 내 마음속을 맴돌고 있던 말은 오늘을 넘기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와 함께 그녀에게 도달했다. 고백했다.


“사실 전 우리 사이를 아직 친구로 보고 싶어요. 얘기했다시피 전 누구와 만나면 그 사람에게 정말 집중해야 하는데 지금 제 상황은 별로 그럴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예요.

그리고 누군가를 알아가는데 전 좀 오래 걸려요. 그래서 의도치 않게 상처를 많이 주고는 하는데, 여러모로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좀 더 알아가 보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적잖이 당황했다.


"괜찮...죠?"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요. 조심히 들어가요" 괜찮은 척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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