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의 연애
첫 화
"조심히 들어가요. 들어가면 연락해요!"
그녀의 대답은 내게 어찌 되었든 기분 나쁘지 않게 애써 둘러댄 거절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지금 시간이 없고 오래 봐야 한다는 시답지 않은 핑계를 제쳐두고서 그저 마음이 연애할 만큼은 아니라는 말을 길고 상처받지 않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것을 거절로 알아듣고 눈치 있게 마음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어느덧 한달 전이 되어버린 첫 만남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출장지에서 만나 처음으로 누군가의 번호를 물어보고 연락을 이어가다 공식적인 첫 식사를 갖고, 그렇게 4번의 만남이 더해진 끝에 고백을 했고, 거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참 운명 같은 만남이라고 생각했었다. 만나게 될 인연이었나 보다 싶었다. 출장지에서 번호를 물어봤다면 그녀의 성격상 안 주었다고, 오히려 고생하셨어요,라는 연락이 먼저 와서 부담 없이 첫 연락을 받아들였다고.
그렇기에 우연이 만들어준 선물이 여기까지 오게 했구나 싶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면 그 만남에서 영화 같은 특별함을 발견하고는 한다. 그러나 현실과 영화의 큰 차이라고 한다면 현실은 영화 같은 마무리로 끝나지 않는다. 현실적인 결말로 끝나기에 현실인 것이다.
비록 이날, 거절의 대답을 들었지만 이후에도 그녀와 연락은 계속 이어갔다. 그녀가 점점 더 바빠지면서 연락의 텀도 길어지고 대화소재도 점점 고갈되어 갔지만 그럼에도 연락은 끊기지 않았다.
퇴근하셨어요?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로운 사람과 상투적이면서 딱딱한 인사를 이어갔다.
그녀와 연락을 이어가면서 그와 동시에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으며 그녀에게 향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옮겨보고자 했다. 그녀를 이제 포기했거나, 새로 연락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녀를 포기해 보려는 노력에서였다. 비겁하고 구차한 방법임은 분명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분과 잘 된다면 그녀와 나눈 지난 한 달의 추억 위에 새로운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덮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덜 힘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녀의 연락텀은 점점 더 길어져갔다. 밤낮으로 바쁜 회사 일정과 개인사의 이유로 답장의 텀은 3시간에서 6시간, 6시간에서 12시간 그리고 이윽고 12시간에서 하루라는 시간으로 커져가고 있었다.
마지막 만남도 어느새 한 달 전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잠에 들어 편안하게 자연사하는 노년의 끝마침처럼 평온하고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잊힐 수 있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오늘 생일 맞지? 예전에 같이 찍은 사진 보고 알았어
전여자친구로부터 온 뜻밖의 문자였다.
“아아 예전 사진들 있었구나. 다 지웠겠다 싶었는데”
“여전히 차갑구나. 멋대로 짐작하는 것도 그대 로고. 하기사 끝에 가서 나한테 엄청 차갑긴 했어.
인스타에 올린 사진 봤는데, 혹시 너 요즘 누구 만나? 내가 상관하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넌 연애하지 마.
너 같이 사람 상처 주고 다니는 애는 누구 만나면 안 돼. 걔 생각해서라도 포기해. 너처럼 사랑받고는 싶은데 줄 줄은 모르는 사람들, 한심해”
내게 있어 자존감이라는 것은 마치 국방부 같은 것이다. 적군이 나타났을 때 그것들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군인들과 방어물로서 나를 보호하고 내 땅에 착지하기 전 적들을 격추시키는 역할이다.
저 친구가 뱉은 말은 무수히 많은 글자들로 흩어져 내 마음 주변을 맴돌다가 폭격을 개시했다. 내 방어체계는 적을 격추하는데 실패했고, 한 글자 한 글자 땅에 박혀 내 마음은 크게 흔들려왔다.
정말 나는 타인에게 상처만 주는 존재일까? 저 친구의 말이 곧 그간 모든 전 애인들이 느꼈을 마음 같아 이미 나 자신조차 나를 나쁜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군인은 국가를 지킬 신의를 잃었고, 나조차 더 이상 내 편이 아니었다.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인데, 이게 내일도 진심일 수 있을지 의심이 되었다. 배려 깊은 태도, 따뜻한 말 그리고 그녀를 향한 정성은 또 다른 희생양을 꼬드기는 미끼가 아닐까 싶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설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녀는 본가에서 이제 막 올라와 무거운 캐리어를 힘겹게 끌고 왔다. 열차에서의 긴 시간은 큰 피로를 안겨준 듯했으며 얼굴을 통해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비록 내 고백에는 거절로 답했지만 친구로서 연락과 만남은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전 부쳐왔어요. 설 연휴 때 어디 안 갔다길래"
명절에 자기는 전 담당이라며 이번에 맛있게 부쳤다는 전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우리 사이에 흘렀음에도 나는 또 뚝딱거렸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고 그녀를 대하는 내 태도는 너무나 어색했다.
그렇지만 대화만큼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대화는 연휴 때 가족에게 서운 했던 일, 친구들과 있었던 일 그리고 최근 직장에서의 일들을 지나 마지막 종착역인 마음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그녀의 속마음에 도착했다.
“관계에서 겁이 참 많았어요. 부모님 모두 저한테 잘해주셨는데. 어째서인지 나를 떠나갈 것만 같은 불안이 늘 있었죠” 이렇게 말하는 그녀 표정에서 그 불안은 아직 가시지 않는 듯 보였다. 아직도 곁에 가까운 누군가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이 친구는 누군가 자신에게서 떠나갈 두려움에 쉽게 곁을 주지 못했다. 연애 초반 상대의 마음을 꼬시기 위한 달콤한 꼬드김도 잘 믿지 않았다. 그 마음은 영원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모든 관계는 유한하다고 믿었다. 모든 건 변하고, 누구든 떠나. 그래서 마음을 많이 주는 만큼 상처도 커. 마음을 주고 싶어도 그녀의 견고한 고집과 방어체계가 마음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간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상처받은 채 그녀를 포기해 왔다.
서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안겨주었던 두 사람이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