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결정은 옳은가, 그리고 늦지 않았는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시간이라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동일하게 주어져 있고, 가장 균등하게 흐르는 객관적 단위라고 말이다.
나는 수많은 이혼소송을 진행하면서 이 말이 언제나 진리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일반논평 제14호에서 아동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절차적 원칙 중 하나로 '시간 지각(time perception)'을 말한다. 아이는 어른과 다르게 시간을 경험한다는 점을 고려하라는 뜻이다.
법원에서의 시간은 일정표로 관리된다.
기일이 잡히고, 준비서면이 오가고, 조정이 시도되고, 다시 기일이 잡힌다.
엄마아빠에게 그 모든 시간은 절차의 일부이다.
그 와중에 양육자는 비양육자에게 아이를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이혼소송이 모두 끝나고 관계가 정리되면 면접교섭을 시켜주겠다고 한다. 지금 아이가 상대방을 만나면 혼란스러워할 것이라며 깊은 한숨과 염려를 쏟아낸다.
이혼소송(위자료, 재산분할, 친권자 양육자 지정)은 최소 1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어른에게 1년은 인생의 한 단락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기다림을 이성으로 마땅히 견뎌낸다.
그러나 다섯 살 아이에게 1년은 삶의 5분의 1이다.
그 시간 동안 만나지 못한 부모는 점점 기억 속의 사람이 되어간다.
아이들에게 기다림은 존재의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부모가 결론을 두고 다투는 동안 아이들은 이미 사계절의 애착을 잃는다.
아이들에게 기다림은 중립이 아니다.
지연 자체가 하나의 결정이 된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이 아이에게는 관계의 단절이라는 결과로 남기도 한다.
엄마아빠는 최선의 이익을 찾겠다고 말하지만 그 최선이 너무 늦게 도착한다면 아이에게 그것은 이미 과거형일 수 있다.
이혼소송은 신중해야 한다.
수많은 이혼소송을 진행해 오면서 차분하고 진중하려 애썼다. 그것이 분노감정이 극에 달한 남편과 아내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신중함이 아이의 시간을 소모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오늘도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시간은 어른의 시간표에 종속될 수 없다.
오래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를 보았다.
벤자민은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진다. 그의 삶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시간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
서로를 향해 가고 있지만 결국 엇갈릴 수밖에 없는 운명.
영화는 시간의 방향이 어긋날 때 관계가 얼마나 허망해지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서로 사랑하지만 같은 속도로 늙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법정에서 만나는 이들을 보면서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엄마아빠는 과거를 붙잡고 다툰다.
“그때 당신이…”
“그때 당신 부모가…”
그러나 아이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아이의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엄마아빠의 시간은 협의와 절차 속에서 천천히 흘러가지만, 아이의 시간은 빠르게 앞으로 달려간다.
벤자민 버튼은 시간이 거꾸로 흘렀기에 사랑을 붙잡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시간은 멈추지 않기에 그 시기의 보호와 사랑을 지나쳐버린다.
아이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도, 멈추지도 않는다.
되돌릴 수 없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유년기는 항소할 수 없고 파기환송도 없다.
지금 누리지 못한 시간을 다시 심리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있어 정의란 늦지 않게 도착하는 결론이어야 한다.
아이의 시간 안에 도착할 때 비로소 정의가 된다.
판사의 이런 마음이 잘 전달되기를 기도하며 사전처분 결정문을 작성한다.
엄마 아빠가 면접교섭을 잘 이행해 주기를...
그리하여 어느 아이가 존재의 따사로움에 눈부시게 행복한 미소 짓기를...
그리곤 또다시 자문한다.
이 결정은 옳은가. 그리고 늦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