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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 3부작] 희망편_ chapter 2. 下

그 새끼를 버렸더니, 개비스콘. 下

by 김대리

Chapter 2. 그 새끼를 버렸더니, 개비스콘.



내가… 너무 과했나?

괜히 혼자 들떴던 걸까.

그의 말 한마디에,

오늘 내내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조금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정수리에 기름 반짝이는 그 사람보다

난 덜 반짝였다.


뮤지컬 보러 가는 내내 그 '반짝이'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 옆에서 딱 반 걸음쯤 떨어져 걸었고,

나보다 앞서 걷지도, 나란히 걷지도 않았다.

뮤지컬 좌석에 앉았을 땐

“자리 애매하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좌석은 VIP 초대석이었다.



'괜찮아. 여기서 네가 제일 반짝여.

VIP 못 보는 것 보니, 안경 꼭 사줄게.'



커튼콜이 끝난 뒤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어 휴대폰을 꺼내자

그는 “나 좀 피곤해서…” 하며

무대 반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입꼬리는 올랐지만,

대화는 내내 끊겼다.



'오늘따라 이 새끼가 왜 이러지?'



뮤지컬이 끝나고,

우리는 밥을 먹으러 갔다.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가게는 한산했고,

나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국수 어때?” 하고 물었다.


그는 곧장 좋다고 했다.

음식이 나오고,

그는 참 열심히 먹었다.

처음엔 그냥 허기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그의 입에서 나는 후루룩 소리와

국물을 들이켜는 꿀꺽 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전엔 이런 모습이 귀여웠던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귀여웠던 젓가락질마저 눈에 거슬렸고,

정말 딱 처먹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면을 몇 가닥 만지작거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물었다.


“... 나 왜 만나?”


그는 내 얼굴을 쳐다보긴커녕

젓가락질만 계속하면서 국수만 보고 대답했다.

“음... 네 옆에 있으면 기분이 좀... 괜찮아지거든.”


잠시 정적.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근데 있잖아,

요즘 너 진짜 예뻐졌어.

...좋아. 솔직히 좀 설레기도 해.

근데...”


말을 흐리던 그는

면발을 한 가닥 더 빨아들인 뒤,

그 특유의 말투로 덧붙였다.

“다른 놈들이 자꾸 너 쳐다보는 건... 싫더라.”

그의 얼굴은 여전히

내가 아닌 국수를 쳐다보는 중이었고

손과 입을 바쁘게 움직여 처먹는 중이었다.


나도 국수 그릇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국수가 나보다 이쁘긴 하네'


우리는 국수를 다 먹고도,

서로 말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이런 날엔,

정 입을 옷 없으면...

정장이라도 입고 와.”

툭, 내뱉듯 말했다.


진짜 화가 나서가 아니라,

그냥.

그 어떤 기대도 내려놔버렸기 때문에.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

“없어. 정장.”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가 천천히 이어서 대답했다.

“운동 시작했잖아.

요즘 좀 찌더라고.

그거 이제 안 맞아.”


'아, 그랬구나.

어쩐지 얼굴도 둥글어지고,

어깨가 덜 슬픈 괄호가 됐다 했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에 새로 살 땐,

제대로 된 거 사.

싸구려 말고,

제대로 된 걸로.”


그는 곧장 되물었다.

“그럼 네가 사주면 되겠네?”


'??'


“너 그런 거 잘하잖아.

꾸미는 그런 거... 나 좀 그렇게 해줘”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이 새끼가 가지가지하네'


순간, 속에서 국수가 체한 건지 신물이 올라왔다.


뮤지컬도, 밥도 끝났다.

그를 보내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게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었다.

예뻐지려고 했던 건 맞는데,

언제부턴가 그 예쁨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긴 하나?’


문득, 생각이 났다.

최근엔 대화도 점점 줄어들었다.

한때는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났던 사람이었는데,

이젠 말이 없는 그를 보며

나도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가 조용해져서 내가 조용한 건지,

내가 먼저 식은 건지.

이 관계가 비는 건,

누가 먼저였는지도 모르겠다.


속은 여전히 쓰렸다.


집에 도착해서 방으로 들어가는데

거실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술병을 밟고 뒤로 넘어졌다.



아이씨!! 순간 참았던 욕이 마구잡이로 나왔다.



욕을 다 쏟아내고, 헉헉 거리다가

이제는 웃음이 났다.


진짜 미친사람 같다.


문득— 낯선 기분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넘어진 김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아프다고, 위로해 달라고,

괜히 심술처럼 엉겨 붙었을 지도.


그런데, 지금은 그냥

조용히 일어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병을 옆으로 밀어 두고

휴대폰을 꺼냈다.


잠깐 망설이다가

문자를 보냈다.


'나, 이만할게.

오늘부터는 너 없이 좀 살아볼래.'


보내고 나니 아무 일도 없었다.

누가 통곡하는 것도, 비가 오는 것도 없었다.

그저… 조금 가벼워졌다.


내가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걸

나 자신이 먼저 느끼고 있었다는 게

조금,

슬펐다.


그렇게 일어나 소화제라도 먹으려고 약통을 찾는데,


답문이 왔다.


'니가 날 버리고 어딜 가?

역시 너 딴 놈 꿰차고 있었구나?

누구야? 언제부터야?

너 나와. 얼굴 보고 얘기해'


바로 차단을 박았다.


허탈하게 웃는데, 더 이상 속이 쓰리지 않았다.



그 새끼를 버렸더니, 개비스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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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써온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조용한 위로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에게는—무너지지 않기 위한 작은 버팀목이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 이야기를 유료로 전해보려 합니다.

‘희망편’ Chapter 3 – 두 번째 이야기부터
이번 주말, 유료 공개가 시작됩니다.

계속 함께해주신다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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