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를 읽으며 수다를 나누다
가족들과 감자탕집에 외식하러 갔는데 소주잔에 빨간 고래가 그려져 있었다. 그 소주잔을 집에 챙겨 오고 싶을 만큼 맘에 쏙 들었다. 바로 사진을 찍고 대학 동아리 밴드에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을 썼다. ‘소주잔에 그려진 나’라는 글귀와 그 빨간 고래가 그려진 소주잔 사진. 댓글로 다들 한 마디씩 한다. ‘그래 너 술고래였지’, ‘옛날 생각나네.’, ‘딱 너네.’ 등등
동기들이 하나둘 군대로 떠나고 복학생들이 들어오던 2학년 때로 기억한다. 어떤 선배가 대뜸 ‘네가 그렇게 술을 잘 마신다며? 술고래라고 그러던데?’ 하며 말을 건넸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나도 웃으며 ‘술 한 잔 사주시면 알 수 있지요.’라고 답했다. 그렇게 그들에게 술을 얻어 마시며 나의 정체는 밝혀졌다. 소주 한 잔도 못 마시는 나를 보고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는 선배들이 나를 기특해했다. 자기들 덕분에 이만큼 술 마실 수 있게 된 거라며 뻐기기도 했다. 내가 술고래라는 별명을 가진 것을 술을 잘 마셔서가 아니라 술자리에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술을 무척이나 잘 마신다고 오해를 할 만했다.
우리 가족들은 아무도 술을 마시지 못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 동생 모두 간에서 알코올을 분해하지 못하는 능력을 지녔다. 대학에 가기 전까지 술을 마신다는 것은 경험해 본 바도 없었고 본 바도 없었다. 나 역시 술은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만난 음식이다. 그 당시 소주는 지금의 것보다 알코올 도수도 훨씬 높고 쓴맛도 강했다. 그 소주를 한 잔 받아놓고 수많은 술자리를 버틴 나다. 버텼다는 것은 틀렸다. 즐겼다는 것이 옳다. 공과대인 만큼 학생회 선배들과 친한 만큼 동아리에 목숨 걸었던 만큼 나의 술자리는 매일 있었다. 여학생들은 으레 9시면 사라지기 일쑤인데 난 달랐다. 술자리가 파하는 그때까지 남아있던 새내기였다. 대학 1년 동안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간 날이 내 기억에 5번도 안 된다.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매를 맞고 통금 시간도 생겼지만, 그 통금 시간은 딱 한 번 지켜봤을 뿐이다. 무척이나 말을 잘 듣던 딸에게 아버지는 당황하셨지만, 사람을 사귀는 것이 너무 재밌다는 나의 한 마디에 믿고 그냥 두셨다. 4년간 그렇게 술자리를 가졌지만 취해서 집에 간 것은 업혀 가는 심각한 상태이긴 했지만 딱 한 번 뿐이었다. 아버지께 취업 걱정이 돼서 막걸리를 몇 잔 마셨는데 이렇게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이렇게 말하는 딸을 어떻게 혼내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울 아버지도 대단하신 분 같다. 딸 걱정을 하지 않으신 건지 철저히 믿으신 건지 알 수 없다. 여하튼 그 덕에 내 대학 생활은 미친 듯이 즐거웠던 것만은 확실하다.
술이란 녀석은 가장 사려 깊은 사람도 노래하고 상냥하게 웃도록 부추기는가 하면 춤추도록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말하지 않는 게 더 좋을 말도 내뱉게 한다.
오뒷세우스 제14권 464행
오뒷세우스가 이타케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이다. 그는 신분을 숨긴 채 거지 같은 나그네로 돼지 농장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다른 일꾼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외투를 빌려주는 친절을 베풀지 시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꺼내는 대사이다. 자신의 말이 어이없더라도 술 취해서 하는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마라는 것이다.
주 5일은 주점을 전전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대학 생활 동안 술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무척이나 많다. 물론 그 추억들이 다 좋다고 할 수만은 없지만, 기억에서 하나하나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술은 사람을 악하게도 만드는 힘이 있다 보니 싸움도 많이 봤고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하는 얼차려도 여러 번 겪었고 비틀거리고 길에서 엎어지는 추태들도 자주 경험했다. 나 또한 소주 한 잔의 술 취해 노래방에서 자고 일어나거나 오바이트를 하는 행동을 수없이 많이 했다. 남들보다 빠르게 술에 취하고 빠르게 깨어서 집에 갈 때만 멀쩡했지 아름답게 술자리를 즐긴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들이 제일 부자라는 우스갯소리처럼 우린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다 어디서 난 돈일까? 물론 십시일반 모아서 그렇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난 용돈이 넉넉지 않았고 새내기인지라 돈이 거의 필요 없었다. 내 차비만 있으면 해결되었고 집 방향이 같은 선배들을 주시하곤 했다. 나도 후배들이 생기니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받은 것의 반의반도 후배들에게 못 해준 게 못내 미안하다.
새내기 시절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동기들에게 얼차려를 시키는 것을 보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 그런 것을 처음 본 나로서는 말리지 않는 다른 선배들이나 그걸 그대로 하는 동기들이나 이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그건 너무 평범한 일이었다. 내가 나서 불편함을 호소하자 그만두기는 했으나 차후 여러 번 겪으니 화가 나기에 이르렀다. 얼차려를 주는 선배는 정해져 있었다. 그 선배가 있다는 술자리는 피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정말 재밌고 배려심 많은 선배였는데 왜 술을 마시면 후배들을 그렇게 괴롭혔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권위적인 사람이었는데 어린 내가 눈치를 못 챘지 싶다. 이렇게 술은 한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 준다.
대학 축제 때 과마다 어김없이 주점을 연다. 다들 과 사람들이 와서 열심히 팔아준다. 학생회에서 운영하지만 새벽쯤 되면 다 같이 마시고 있기에 주점의 의미가 없다. 적자 보는 장사이다. 다음날 오후가 되도록 주점은 정리되지 못한다. 모두가 뻗어서 술병은 벤치에 어지러이 널려있다. 요즘은 금지된 것으로 알고 있다. 사건 사고가 잦아서 취해진 조치라 이해는 되지만 이런 경험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엠티에서도 술은 빠질 수 없다. 많은 인원이 함께 마시기 시작하지만 한 명씩 사라지고 몇 명만이 남아서 마시는 건지 자는 건지 알 수도 없는 술자리를 이어간다. 그리고 다음 날 숙취의 고통에 모두 몸서리치며 계획한 여정은 무시된다. 어리석은 청춘들의 엠티다.
십시일반도 되지 않는 날에는 학교에서 마시는 수밖에 없다. 지하 학생회실에서 새우깡과 번데기에 소주를 마시던 기억이 난다. 사진 현상액을 데울 때 쓰는 작은 열기구에 번데기를 데워가며 마셨다. 소주를 종이컵에 부어서 한참을 마셨다. 어떤 때는 술을 마시고 다들 차비가 없어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옥탑방이던 동아리 방에서 다 같이 잠을 청했고 새벽이 되어서야 귀가를 했다. 어떤 때는 서로가 차비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놀다가 둘 다 택시비가 없어 첫 버스가 운행될 때까지 걷기도 했다.
참, 용감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난 그 수많은 술자리에서 소주를 1잔 마신 게 다였다. 그것도 점점 쌓이다 보니 4학년이 되었을 때 4잔 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나 아주 가끔 가능했다. 지금은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없다. 그때만 가능한 행동들이다. 이 나이에 이런 행동을 한다면 부끄러운 짓이다. 길에서 술 취한 젊은이들을 보면 한심하기보다 20대의 내가 떠오른다. ‘너희가 그러는 것도 한때다’라는 생각에 얼굴이 찌푸려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또래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나이가 몇인데 여전히 저러나’라는 한심함이 먼저 떠오른다. 오로지 젊은이가 가진 특권인 것 마냥 그들에게만 유연하다.
예전보다 술이 부드러워져서 마시기 편해졌지만, 여전히 소주는 잘 마시지 못한다. 맥주는 몇 잔 마실 수 있지만 많은 수다가 동반되어야 한다. 내가 술을 잘 못 마셔서 안타까워하는 이는 남편이다. 그는 반주를 즐기는데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장모님 찬스를 자주 쓴다. 5분 거리에 사는 장모님을 초대해 잔을 기울인다. 그리고 기분 좋게 알딸딸하면 고스톱을 함께 즐긴다. 뒤늦게 배운 나는 구박을 많이 받았지만 이젠 나도 제법 판의 흐름을 읽으며 패를 버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돈을 따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는 장모님께 그 돈을 용돈으로 드린다. 이렇게 술 한 잔으로 장모님과 사위는 사이가 돈독하다.
큰아들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치맥을 할 때 맥주를 한 잔씩 권한다. 나보다 잘 마시고 술을 좋아한다. 어릴 적 음료수인 줄 알고 막걸리를 여러 잔 마셨을 때 이미 알아보았다. 아들에게 술이란 녀석을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술이 너를 마시는 순간까지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그 책임은 자신의 몫이기에 적절한 술을 마시기 권한다. 내 20대와 모순적이고 술 취한 젊은이를 보는 마음과도 모순적이다. 그렇지만 내 아들이 그러고 다니는 건 말리고 싶다. 보기 흉해서가 아니라 행여나 나쁜 일에 연루될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적당한 술을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블랙아웃이 되도록 마시는 술은 당연히 문제가 된다. 술이 사람을 마시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술을 마시는 이유를 알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잊기 위함이라면 안심할 수 있는 장소에서 믿을만한 사람과 마시기를 권한다. 즐기기 위해 마시는 술이라면 끝까지 즐거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미리 마실 양을 정해놓기를 권한다.
오뒷세우스 말처럼 술은 사려 깊은 사람도 부추기고 해서는 안 되는 말도 하게 하다. 우리를 다른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그러니 경계해야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