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엄마와 가혹한 교육

시카고 라이프

by Professor Sunny

이민 1세대로 산다는 것은, 아무도 나에게 알려줄 수 없는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면서 오는 신선함과 짜릿함이 있는 대신에, 그 이면의 쓸쓸함이 있다. 그 일례로, 주변에 가족이나 친척이 없기에, 사실 남편이 없다면 내가 오늘 당장 죽어도 알아차려 줄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운 좋게 빨리 발견되어도, 나의 죽음을 주변에서 함께 슬퍼해 줄 사람이 많이 없을 수도 있겠다. 한국을 일찍 떠나온지라 한국에서도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몇 안 될 거 같다. 나에게 이민자의 삶이란 낯선 땅에 정착을 위해 자신의 생활 반경과 뿌리를 수공업 하는 열띤 과정으로 여겨진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종종 유언장 같은 메모를 남겨 놨었는데, 이것은 내가 꼭 비관적인 사람이라기보다는, 미래를 계획하는 한 방법이었다. 사람이 사는데 부지불식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비명횡사를 할, 단 0.0001%의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 손편지에서 한 번씩 불러주고 죽는 게 의미 있겠다 싶었다. 또 그맘때쯤까지 삶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고, 나는 꽤 즐겁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글로 적어 놓고 싶었다. 나는 이런 내용을 문서화해놓고는 장롱 뒤에, 혹은 책장 뒤에 안 보이는 곳에 그 메모를 붙여 놓았다. 그곳에 붙이면서도, ‘나 죽고 나서도 아무도 장롱 뒤를 안 보는 건 아니겠지?’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문서화는 차라리 쉬운데, 내 아이를 낳고 나니, 이 어린아이에게는 ‘문서’가 소용이 없겠다 싶었다. 아이는 만 4세쯤 되자 죽음으로 인한 부재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왜 죽는 거야, 언제쯤 죽어, 죽으면 어떻게 돼?’ 하는 질문들을 쏟아 냈다. 이 미국에서 우리는 달랑 세 가족이다. 남편, 나, 아이. 어느 날에 남편과 내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하면 이 아이는 이 미국 땅에서 정말 혼자가 된다. 남편과 나는 그게 너무 끔찍했다. 나는 당장 내가 엄마로서 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일을 설명해 주어야 하는가, 어디까지 알려줘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이가 만 6세가 되었다. 나는 하루는 아이를 붙잡고, 죽음과 가능한 죽음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다른 날은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 기독교적인 견해로 설명도 해줬다. 그러고 나서 나는 아이에게 응급 상황에 그가 취해야 할 행동과, 다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교육을 해줬다. 아이는 첫날은 좀 울기도 했다- 엄마가 없는 상황은 싫다고. 나는 아이 마음에 상처가 가지 않도록 조금씩 나눠서 설명을 해주고, 시간 차를 두고 교육했다.


우선 핸드폰 사용법을 알려줬다. ‘엄마나 아빠가 동시에 없을 때는 너는 할머니한테 카톡을 거는 거야- 그러고는 ‘엄마 아빠가 없어졌어요’라고 말해, 그러면 할머니가 한국에서 너를 데리러 올 거야’. 그렇게 하고는 핸드폰을 켜서, 카톡을 실행시켜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거는 방법을 시뮬레이션해 줬다. 이런 교육을 하면서도 나는 ‘이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교육을 했나’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아이는 그래도 잘 버텼다. 엄마 아빠가 없어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가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으니 그 믿음이 아이를 견디게 해 준 것 같다.


아이와의 대화는 점점 심도 있어진다. 사실 이민자로서 사는 장점 하나는 여기에 있기도 하다. 가족밖에 없으니, 가족과 앉아서 옹기종기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다. 나는 이 아이가 세상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본인만의 툴을 안정적으로 형성해가는데, 좋은 조력자가 되어주고 싶다.


(남편의 뜬금없는 사랑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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