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씩씩한 내가 의존적으로 변하는 순간이 종종 있다. 그 유일한 때는 몸이 아플 때다. 어릴 때는 아파도 나 혼자 감당할 만큼의 체력은 남아있었는데, 이제는 한번 아프면 내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체력이 바닥난다. 아 이게 늙는 건가? 최선을 다해 끝까지 아파야 회복이 보인다.
그럼 나는 징그러울 정도로 남편한테 들러붙는다. 스스로 외국인 노동자라 칭하는 우리는 평소에 각자의 삶을 사느라 너무 바빠 서로에게 신경 쓰기보다는 각자 돈을 벌고, 주어진 집안일을 하고, 한 아이를 같이 키우는 그런 공동 책임감을 수행하느라 바쁘다. 그나마 체력이 좋고 잔병치레가 별로 없는 나에게 아픈 날은 1-2년 사이 고작 얼마 되지 않는다. 내가 아픈 날은 이러한 정신없는 일상의 루틴이 깨지고 남편은 날 돌봐야 한다- 내가 남편한테 억지로 지워준 의무다 (하하). 그래도 남편은 아플 때 들러붙는 나의 모습을 보고 ‘가끔 네가 아픈 것도 좋다’라고 스위트 한 말도 날려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숨을 못 쉴 정도의 공포가 밀려오는 일이 있었는데, 최근 어느 순간 그게 운전으로 바뀌었다. 특히 모르는 길을 갈 때, 거대한 나무 가지들이 도로 주변에 나부낄 때 그게 한순간 큰 공포로 다가오고, 그 공포가 인지되면 내가 달리고 있는 차선의 레인이 나를 눌러 버리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운전을 멈추고 싶을 정도로 공포의 크기가 변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포기하고 기차로 출근하기로 결정했다. 한 시간을 달려가는 기차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한동안 운전을 안 하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이번 공포는 얼마나 갈까. 기차로 출근을 결정하는 얘기를 나눌 때 남편은 내가 엄살을 부리며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던지, 이 일을 꽤 심각하게 받아들여 주었다.
나를 꽤 잘 아는 이 사람은 내가 고마움을 느낄 만한 포인트를 정확히 안다. 그래, 고맙게도 15년간 이 사람은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일에 깊게 개입해 나를 잘 붙들어 왔다. 특히 내가 아플 때는 본인의 인내심 탄성을 끝까지 늘려 주는 편이다. 열이 며칠째 안 떨어지며 아프던 밤에는 물수건을 적셔와서 온몸을 닦아준다거나, 툴툴대면서도 나 대신 빨래를 해준다거나.
내가 본 이 사람은 꽤나 자유로운 영혼이다. 우리는 2007년 내가 처음 미국으로 오자마자 뉴저지 주립대의 어학연수 코스에서 만났다. 그 반에는 나와 남편을 포함, 딱 3명의 한국인이 있었는데, 나보다 딱 미국 생활 6개월 선배들인 이 남자 사람들은 본인들이 몸으로 부딪혀 얻은 미국 생존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하사했다. 그중 한 남자 사람이자 후에 나의 남편이 된 사람의 첫인상은 딱 “뭐 이런 종류의 사람이 있나”였다. 그는 20대의 자신감과 허세가 아직 가시지 않은 말투와 오늘 뒷골목 싸움에 나가도 손색없을 만큼의 불량기 가득한 표정을 장착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한국 사람이죠?” 하며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는 애매한 얼굴 표정은, 정말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본인만의 장르로 가벼운 농담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혼자 웃기는지 끅끅 웃기도 하는 그 모습이 나는 굉장히 신선했는데... 그게 참 애매하게도 그의 개그가 재미있는 것 같으면서도 새털 같은 가벼움을 견딜 수가 없어서인지 그의 개그 코드에 적응하는 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그래도 유일한 한국 친구였던 우리는, 나름 어학연수생의 태도에 걸맞게, 미국 문화 체험에 같이 나섰고, 영화관, 뉴욕 관광, 뉴욕의 유명한 Macy’s 백화점의 Thanksgiving parade까지 함께 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15년이 지나며 이제는 완전한 동반자가 되어버린 우리는 동시에 40살이 되며 제대로 아줌마 아저씨의 길로 접어들었다. 어느새 철이든 아저씨는, “철이 드는 건 인생이 힘들어지는 일이었어”라고 한탄했었다. 어릴 때 만나서 서로 ‘사람 구실은 하겠나’까지 걱정했던 우리가, 서로가 하나씩 맡고 가야 하는 삶의 책임감을 이행하는 데서 이탈하지 않도록 나름 모니터링을 해주며 나란히 서있다.
기차에서 내다본 우리 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