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가 잘나고 못나고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본연의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잘생겼다, 예쁘다의 정확한 정의는
누가 내리는 것인가.
모든 사람의 기준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인다.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이라면
되려 그것만큼 추한 것이 없다.
그 사람에게 누군가는 잘생기지 않고,
예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다.
오히려, 정말 악하고 비겁한 사람들은
어쭙잖게 생겨서 본인의 결핍을 감추려
타인의 외모를 폄하한다.
그들은 마치
타인의 얼굴을 비웃음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덮으려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런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추함’이 아닐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
웃기는 개소리다.
“관상은 과학이다?”
그런 말을 믿는 네가 과학이다.
외모지상주의,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만든 건 다름 아닌 우리다.
그러니 이 시대를 탓할 자격도,
남을 손가락질할 권리도 없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나와 조금 다른 누군가를 보며
쑥덕거린 적 없는가.
다른 사람과 다르게 대했던 적 없는가.
나부터 외모로 사람을 판가름 내리고,
그에 따라 사랑을 다르게 주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찌 그들이 우리를
같은 눈으로 바라보길 기대할 수 있을까.
외면을 보고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단면을 보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오만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깨닫지 못한다.
마치 겨울잠 자는 소라게를 들고
파도 소리를 듣겠다고 귀에 가져다 대는 것처럼.
겉치레와 포장에 현혹된 채
속을 들여다볼 줄 모른다.
화려하게 포장된 껍데기보다
진정한 보석은 언제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다.
그걸 알아보는 건 재능이다.
그러니 “좋은 사람을 만나자”보다
“해로운 사람을 만나지 말자”는 말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조언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것조차
사람을 ‘거르는’ 행위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편견의 울타리 안으로 숨어든다.
겹겹이 둘러싸인 편견은
사회가, 그리고 우리가 만든 가시넝쿨이다.
그 가시가 고슴도치처럼
서로를 찌르고 멀어지게 만들지만,
진심으로 다가가면
그 가시는 따뜻한 털처럼 변해
온기를 나눈다.
편견은 언제나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러니 그 편견을 걷어낼 용기도
인간에게 달려 있다.
그 누구도 어떤 이를 향해
함부로 판가름할 수 없다.
그 자가 홈리스라 할지라도,
그 자가 주정뱅이라 할지라도,
그 자가 세상의 경멸을 받는 사람이라 해도,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보지 않았다.
직접 겪고, 느끼고,
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 적이 없다면
판단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우리는 모두 평등한 인간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외모로 서열을 매기고,
표정으로 인성을 예측하며,
옷차림으로 품격을 단정 짓는다.
그건 파도 소리를 듣겠다고
소라를 귀에 가져다 대면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라고 탓하는 일과 같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소라가 아니라,
듣는 자의 귀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외모는 절대적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선의 방향일 뿐이다.
진짜 아름다움은
빛나는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밝히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그 빛은
메이크업으로도, 필터로도
만들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