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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파랑새 Feb 10. 2023

화학물질, 무섭다고요?

참사의 교훈과 안전사회(1) : 독립적인 화학물질 관리기관이 필요하다

화학물질은 안전할까? 가습기살균제참사는 화학물질이 왜 위험한지를 보여주었다. 우리에게 수많은 편익을 가져다준 화학물질이, 어느 순간 악마의 물질로 둔갑했다. 소비자들은 두려워했다. '케모포비아'(화학물질과 공포를 합친 말)라는 말도 생겼다. 왜 그런 것이었을까. 칼을 잘 사용하면 생활의 도구가 되지만, 무기로 사용하면 살상의 도구로 변한다. 칼처럼 화학물질도 사용하기 나름이다. 안전하게 사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가습기살균제참사는 흡입독성을 가진 유해한 화학물질이 사전에 걸러지지 않은 채 소비자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제품에 포함된 것이 문제였다. 가습기살균제가 공기 중으로 분사되어 사람에게 흡입될 경우 ‘흡입해도 안전한 지’ 여부, 즉 ‘흡입독성’이 사전에 확인됐어야 했다. 


사전 확인 또는 검증은 무엇인가. 일종의 ‘게이트키핑(gate keeping)’이다. 특정 화학물질이 어떤 독성을 가진 것인지, 특정 용도로 사용할 경우 안전한지 사전에 점검하는 과정이다. 이는 특정 화학물질에 대한 안전성 정보를 확보하여 이해관계자들이 해당 정보를 알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사 이후 정부는 ‘화학물질등록 및 평가법(이하 화평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화평법은 화학물질 안전관리를 강화한 법으로써 ‘모든’ 화학물질(실제 화평법은 세부 규정이 있어 예외가 있지만 법 취지에 따라 편의상 ‘모든’으로 표기한다.)에 대해서 정부에 등록하도록 규정한 법이다. 


화평법에 따라 화학물질을 사용하려는 기업은 해당 화학물질의 안전자료를 생산해서 정부에 등록(제출)해야만 한다. 화평법은 이러한 방식으로 시장에서 유통되는 화학물질의 모든 정보를 확보하여 화학물질 관리의 사각지대를 해소해 가는 법이다. 다시 말하면, 화평법은 기업에게 화학물질 정보 생산의 의무를 부여한 것이고, 정보를 생산하지 못할 경우, 즉 정보를 등록하지 않을 경우 해당 화학물질은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른바, ‘노 데이터, 노 마켓(No Data, No Market)’이다.      


정부는 기업이 제출한 화학물질 정보에 따라 위험을 평가하고 위험한 물질은 사용을 금지하거나 제한하고, 불가피하게 사용할 경우는 엄격한 관리를 통해 사용하도록 화학물질 관리의 효율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화평법은 위험한 화학물질의 사용을 억제하고 안전한 화학물질을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기업은 화학물질 정보 생산에 따라 비용이 들 수밖에 없지만, 결과적으로 위험한 물질보다는 안전한 물질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화평법은 기업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규제법’ 성격을 갖지만, 화학물질의 안전 사용으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화학물질 안전법’이라고 볼 수 있다.      




화평법은 유럽의 신화학물질관리제도인 ‘리치(REACH)’를 모델로 도입되었다. 유럽의 경우도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위험에 대응하는 시행착오의 역사를 거치면서 현재의 리치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유럽은 리치에 따라 역내에서 사용되는 모든 화학물질(‘모든’은 위의 화평법과 같은 의미이다.)에 대해서 등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노 데이터, 노 마켓(No Data, No Market)’의 사전 예방의 관리원칙을 구현해가고 있다.      


유럽에는 리치에 따른 화학물질 등록기관으로 ‘유럽화학물질청(ECHA)’이 있다. 유럽화학물질청은 회원국들의 화학물질 관리 부처나 기관과 협력하여 화학물질을 등록평가하고 있다. 화학물질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독립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유럽은 리치와 유럽화학물질청을 통해 기업에게 화학물질 정보 생산과 사용에 대한 책임을 명확하게 부과함으로써 기업의 책임과 역량을 강화해가고 있다. 화학물질 안전성 자료를 확보할 수 없는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유럽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 리치의 철학과 원칙이며 목적이다.      




유럽 리치를 모델로 도입된 화평법은 어떻게 운용되어야 할까. 국내 화평법은 당초에는 유럽 역내로 수출하고자 하는 기업들의 시장 진입을 지원하기 위해 도입이 검토되었다. 유럽의 화학물질 규제에 맞추지 못하면 해당 국가로 수출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2011년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불거졌다. 정부는 참사 이전에는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이하 유해법)으로 유해 화학물질을 관리해 왔다. 참사 이후 2013년 국회에서 심상정 의원이 화평법을 대표발의하여 제정되었다. 화평법 제정 당시 전경련 등 경제단체의 반발이 있었다. 당시 피해대책 활동을 하고 있었던 나는 환경단체 회원들과 함께 전경련 앞에 가서 전경련을 규탄했다.      


화평법은 2015년부터 시행되었다. 화평법의 제정과 시행은 국내 화학물질 관리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였다. 가습기살균제참사의 대표적인 재발방지 대책 중 하나였다. 리치가 유럽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화평법도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화평법이 갖는 규제적 성격으로 전경련 등 경제계의 반발이 없지는 않았지만, 화평법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한다는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화평법의 이행 기반(시스템)을 적극적으로 구축할 필요성이 있다. 화평법이 유럽 리치를 벤치마킹했다면, 리치의 이행 시스템도 국내 상황에 맞게 적극적으로 구현될 필요가 있다. 리치가 유럽화학물질청을 통해 작동되고 있듯이, 화평법도 전문화되고 독립된 기관으로서 ‘화학물질청’과 같은 화학물질 전문기관이 필요하다. 


이를 ‘한국형 화학물질청’이라고 불러도 좋고, 제3의 어떤 모델로 불러도 좋다. 핵심은 화학물질 관리업무가 독립성과 전문성을 원칙으로 구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모델이 미래사회에 부합하는 방식이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느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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