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분자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은 작년부터 이어져온 제 삶의 질문입니다.
아니, 아마 저의 생애 동안 해 온 질문이 아닐까요.
마음 한 구석에 오랫동안 간직해 온 질문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해진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책을 읽으면 왠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다시금 느낍니다. 역시나,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요.
이 책은 중학교 1학년 소년 '코페르'의 고민과 그의 외삼촌이 고민에 조언을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자칫 잔소리로 흐를 수도 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외삼촌의 긴 조언은 노트에 담겨 있으니까요. 말로 휘발시키지 않고, 코페르의 행동과 말을 깊이 생각해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적어둡니다. 어느날 이 노트를 아이에게 주었을 때, 효과가 훨씬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언젠간 이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코페르는 생각이 깊은 아이입니다.
어느날 문득 옥상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깨닫습니다. 사람이 '분자'라는 것을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존재이고, 그 작은 존재들이 모여 우주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요. 중학교 1학년의 깨달음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 코페르에게 어느날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코페르는 3명의 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명 '기타미'라는 친구는 덩치도 크고 고집도 셉니다. 어디서든 기죽지 않지요. 상급생들이 기타미를 벼르고 있다는 소문이 납니다. 모두가 기타미를 걱정하며, 혹시라도 기타미가 맞게 되면, 함께 지켜주기로 '결의'를 합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은 가장 행복할 때 찾아오곤 합니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날,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하며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코페르는 자기 진영에서 몸을 피하다 갑자기 기타미와 친구들이 사라진걸 확인합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상급생들에게 기타미가 둘러 쌓여 있습니다.
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눈사람을 부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상급생들에게 둘러 쌓였지만 기타미는 기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 보였습니다. 다른 두 친구는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기타미의 편을 들었지만, 코페르는 무리의 뒷편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분명 약속을 했는데.. '기타미 친구들은 다 나와'라고 상급생이 외치는 순간에도 코페르는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습니다. 너무 무서워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손에 쥐고 있던 눈뭉치를 털어냅니다.
결국 기타미는 상급생에게 맞게 됩니다. 친구들도 모두 밀쳐지게 되었지요.
수업 종이 치며 상황은 일단락 되었고, 기타미와 두 친구는 그제야 서로 부둥켜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억울함과 분함의 눈물이었지요. 세 친구가 깊은 우정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이에도 코페르는 멀찍이 떨어져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결국 세 친구가 서로 어깨를 감싸며 교실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코페르는 망부석이 되고 맙니다.
그날 이후 코페르는 심한 감기에 걸려 이주 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합니다.
그동안 그는 고통과 괴로움에 몸서리치지요. 몸이 아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신 있게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에 대한 괴로움이었습니다. 코페르는 식욕도, 말도 잃어 갔습니다.
과연, 코페르는 이전의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친구들과의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요?
코페르와 베드로 그리고 나
코페르의 고뇌를 읽어나가며, 마음이 저려왔습니다.
코페르의 실수가 남의 일 같지 않아요요.
상상 속 나는 너무나 멋지고 용감하지만, 현실의 나는 너무 작고 여린 '분자'입니다.
나는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를 도와줄 용기조차 못내는 사람입니다.
코페르의 고뇌에서 문득 베드로가 보입니다.
자신 있게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단언한 베드로입니다.
아마 그때 베드로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겁니다.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했고,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봤습니다.
그의 외로움도 베드로는 압니다. 그러기에 끝까지 예수를 지키겠노라고, 버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것이지요.
© martino_pietropoli, 출처 Unsplash
그러나 그의 다짐은 한낱 그림자와 같았습니다.
더 큰 존재 앞에서 무참히 가려져 버리는 그림자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가 무참히 잡혀가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을 때,
사실 그때 베드로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망가다가 돌아왔을지도 모르지요.
예수가 마음에 걸려서요. 예수에게 너무 미안해서요.
용기가 없어 차마 예수 곁에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그 근처에서 맴돕니다.
그러다 예수의 일행임을 알아본 누군가에게 딱 걸리고 만 것이지요.
'너도 예수와 같은 일행이지!!'라며 외쳐대는 목소리와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가는 수만은 눈동자 앞에서 베드로는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그래, 내가 바로 예수의 제자다! 예수는 아무 잘못이 없다!'라고 속시원하게 외쳐야했을까요?
그건 소설 속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나는 예수를 몰라요'입니다.
그게 바로 분자, 인간이지요.
동이 트고 닭이 세 번 울고서야 베드로는 예수의 말이 떠오릅니다.
'베드로야, 닭이 세 번 울기 전 니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것이다.'
그때 베드로가 느꼈을 부끄러움과 고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몇날 며칠을 먹지도 자지도 못한채 고통스러워하던 코페르와 베드로,
그리고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나'.
우리는 모두 분자입니다.
이토록 작은 분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쩌면, 우리는 분자라서 서로에게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요.
그리 대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렇게 모자라지도 않은.
서로가 있어야 물질을 이루는 분자가 아닐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 앞에 다시 섭니다.
외삼촌의 노트를 받은 코페르는 어머니에게 노트를 선물 받습니다. 외삼촌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가라는 뜻으로요. 코페르는 무엇을 적어야 하나 고민하다 포기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외삼촌의 노트를 몇번이고 읽은 코페르는 그제야 노트에 조금씩 적어갑니다.
외삼촌.
나도 오늘부터 이 노트에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쓰기로 했어요. 외삼촌이 노트에 나에게 이야기하듯 쓴 것처럼 나도 외삼촌에게 내 생각을 말하듯이 쓰려고 해요.
....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외삼촌 말씀처럼 나는 소비 전문자고, 아무것도 생산하는 게 없어요. 우리가와와 달리 지금 나는 무언가 생산해 내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하지만 좋은 사람은 될 수 있어요. 내가 좋은 사람이 된다면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거예요. 이만한 일은 나도 할 수 있어요. 내가 이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좋은 사람이 되는데 그치지 않고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믿어요.
칼부림의 나라에서 살아가면서, 코페르의 글을 읽으니 더욱 와닿습니다.
어떻게 살 것이냐는 말은 얼마나 대단한 삶을 일궈낼 것이냐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삶의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얼마나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담긴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