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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형 인간의 타인 사랑하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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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나는 올여름, 대학에 입학했다. 아마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만 나이 18세 학생이다.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해, 열심히 편입을 준비하는 아주 평범한 1학년 학생이기도 하다. 심리학에 빠져버린.


지지난번 심리학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는 애착유형에 대한 부분을 아주 잠시 짚고 넘어갔다. 그리고 애착유형에 대해 잠깐 배우며,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아주 극심한 회피형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마음 깊은 곳으로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알고 있었다. 내가 상황을, 결과를, 그리고 사람을 회피한다는 사실을.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을까? 타인을 사랑한 적이 있을까? 나 자신을 사랑한 적이 있을까? 누군가가 떠나간다고 해도 나는 항상 이렇게 혼잣말했다.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는데 뭘. 그러면서 나는 나조차도 떠나보내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편입이라는 성취를 위해, 나는 나를 내던지고 있었다. 나라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성취라는 이름의 다른 누군가가 되어버린 듯했다. 나를 자랑스러워하시는 부모님, 각 과목 옆에 쓰여있는 점수들로부터 너무나도 하찮은 자존감을 찾으려 이리저리 방황하는 나는 사실 얼마나 작디작은 존재인가.


부모님께서는 나를 대견하다고 생각하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부모님은 나라는 사람을 대견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성취를 쫒는 저 낯선 이를 대견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일까?


나는 누구의 자존감을 채워주려 하는 것이지? 나의 자존감? 그럼 다시, 나는 무엇이지?


두 번째 중간고사가 끝나고, 여유가 생기자 이렇게 성적 너머 미래의 일들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강제적으로 주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이것을 마주했을 때 나는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비참했다.

나는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시간을 내어주기 귀찮은 존재구나. 나를 가장 가깝게 여겨주는 사람은 없구나.

하지만 점차 우울 속에 가라앉으며, 나는 깊은 어둠 속에서 사실을 직시했다. 이 모든 걸 그렇게 만든 건 너잖아. 바로 나.


생각해 보자. 대학에 와서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호의만 보이며 다음 만남을 기약만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 만남이 앞으로 다가오면 피하는 건? 대학에 오기 전에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를 애써 만들며 정을 붙이지 않는 건? 누군가를 만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나는 나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네가 정말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애정하는 사람은 누구야? 그리고 그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두 번째는 자기연민이었다.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내가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내가 정말 불쌍하고 안타까웠나?

아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자기연민이라는 이름을 씌워 숨기려 했던 것은 자랑스러움이었다.

사실 나는 자랑스러웠다

독립적이고, 남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외로움을 타지 않는. 사회적 고립감을 느낄 때쯤에 간신히 다른 이와의 대화로 그 공허를 채우는. 그런 내가 나는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남들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애정을 갈구하는 이들을 어쩌면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지금은? 지금의 나는 어떤 단계를 거치고 있을까?

지금의 나는 자기연민, 아니, 자랑스러움을 단계를 지나 복합적인 감정들을 느끼는 단계를 지나고 있다. 비참함,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다시 한번 자신의 구덩이를 파, 그 안에 웅크리고 슬퍼하려 하고 있다. 그 구덩이에서 나는 자신의 모순됨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최근에 나는 구덩이에서 선택을 내렸다. 도피. 그래 도망가자. 자신의 비참함에서, 비참함에서 새어 나오는 영문 모를 자랑스러움에서, 벗어나자.




나는 주로 글을 쓸 때, 뭐라고 마무리 지을지 얼추 생각하며 글을 쓴다. 즉, 이미 정리가 끝난 생각들을 적는다는 말이다. 내가 글을 썼던 목적은 다른 이들에게 번뜩이는 영감을 주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 나이를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었다. 아주 오만한 말이지만 그동안 내가 어리니까 뭘 알겠느냐는 선입견에 씌어 분명 어딘가 쓸 수 있을 가치들을 놓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마무리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 글은 내 생각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며,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그 어떠한 영감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으로 이 글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다. 어쩌면 나와 같은 상황을 겪는 당신을 위한 글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를 담은, 나의 치욕과 약점, 즉, 비밀이 담긴 글이다.


이다음 글을 언제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앞으로 내가 어떤 마무리를 지을지, 나는 알 수 없다. 마무리가 날지조차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인간 아닐까. 평생 마무리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품은 존재. 그 존재로서 나는 살아가 보려 한다.






영화 <Good Will Hunting (굿 윌 헌팅)>, directed by Gus Van Sant (거스 밴 샌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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