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이제 정말 가을이네. 조만간 같이 바스락, 낙엽을 밟을 수 있겠어.
"엄마, 지금 가을이에요?"
"가을은 가을인데.. 덥네?"
10월 초까지도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했었더랬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더웠다.
늘 속에 열불을 품고 사는 나만 그렇게 더웠던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만나는 아이들 친구 엄마도 늘 반팔차림이었던 걸 생각하면 음.. 역시 나만 더운 건 아니었겠지, 싶다.
아무튼 아이들은 가을을 그렇게도 기다렸다. 가을이 왜 좋아? 하면 정말 딱 아이들이 할 만한 말들을 했다.
"가을에는 나뭇잎들도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이 돼서 예뻐요."
단풍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나도 단풍을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는 단풍이 든 후에 바닥에 수북하게 쌓이는 낙엽들이 좋았다. 그런걸 보면 그냥 나도 모르게 밟고 싶어진다. 작년 가을에는 부쩍 잘 걷게 된 22개월의 아이들과 함께 그 낙엽더미들을 신나게 밟고 다녔다.
아이들이 가을을 기다리던 이유는 또 있었다.
기온이 35도까지 치솟았던 무더운 여름날, 아이들은 급 킥보드에 꽂혀 킥보드를 타러 나가자고 졸랐다.
"안돼. 킥보드는 이런 날 타는 게 아니야. 너 삐뽀삐뽀 타고 병원 실려갈 수도 있어."
"그럼 언제 타는데요?"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가을날 타는거야."
"그럼 언제 가을이에요?"
"글쎄. 언제랑 상관없이 나뭇잎이 알록달록해지고 바람이 시원해지면 그때가 가을일거야."
이런 대화를 하며 아이들의 한여름 킥보드 욕구를 겨우 잠재웠다.
그러다 10월 중순이 지나자 꽤 시원해졌다. 아이들은 등원길에 늘 "지금 가을이에요?" 라고 물어보았다.
"응, 가을이지."
"그럼 킥보드 탈 수 있어요?"
"응. 아빠가 쉬는 날 같이 나와서 타자."
그렇게 킥보드 타기로 약속을 하고, 아이들 아빠가 쉬는 날 킥보드 두 개와 안전모, 보호대 등이 들어있는 가방을 짊어지고 집 앞 공원으로 나갔다. 봄에 조금 타다 말았던 킥보드와 반년만에 다시 만난 아이들은 매우 신이 나 있었다. 안전모와 보호대를 착용하고 킥보드를 타라고 줬더니 야야가 순식간에 휙 가버렸다.
남편과 나는 아이들을 각각 한 명씩 맡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생각보다 킥보드에 꽤 익숙해 보였다.
"아니, 얘네 킥보드 왜 이렇게 잘 타?" 놀라워서 남편한테 말했더니 아마도 언니, 오빠들이 타는 걸 보고 눈으로 조금은 익힌 것 같다고 했다. 그게 되나...? 어쨌든 부쩍 큰 것 같아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그러다가 냐냐에게 다가가 "엄마가 좀 잡아줄게. 그럼 좀 더 빨리 갈 수 있어." 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냐냐의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나는 순간적으로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엄마, 나도 혼자 연습해야지. 이제 언니 될 준비 할거야."
확 서운함이 몰려왔다. 도움을 마다한다고? 언니 될 거라고?
벌써?
냐냐는 부쩍 요즘 언니놀이에 심취되어 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냐냐는 야야를 자주 때렸다. 주로 야야의 장난감이 갖고 싶은데 냐냐 맘대로 되지 않으면 야야를 때리거나 꼬집었다. 거의 매일 냐냐를 혼냈던 것 같다.
"야야 장난감 가지고 놀고 싶으면 어떻게 말하라고 했어!"
"야야, 나 이 장난감 가지고 놀아도 돼?"
"야야가 안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해!"
"그러면 그래, 알겠어. 하고 다른 거 가지고 놀아야 해..."
"근데 왜 때렸어!"
나는 냐냐에게 매일 혼을 냈고, 냐냐는 한동안 '난 삐뚤어질거야'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그랬던 냐냐가 어느 순간부터 야야를 더 이상 때리지 않고, 마음대로 되지 않거나 화가 나는 상황에서는 "나 정말 화가 나!" 라고 외치는, 아주 멋진 34개월 아기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야야가 냐냐를 때리고 꼬집는다. 아마도 틈새를 공략하고 우위를 선점하려는 게 아닐까. 하지만 엄마 앞에서는 그게 택도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잘 안다. 냐냐의 성장을 보니 야야도 내가 속에 열불을 조금 더 품고 지내다 보면 좋아지지 않을까?
(멋진 냐냐는 그럼에도 야야를 같이 때리거나 하지 않고 "하지마! 나 화가 나!" 라고 소리지를 뿐이다)
아무튼, 그런 냐냐의 '언니 될거야' 발언은 어미의 마음을 퍽 복잡하게 만들었다. 언제 저렇게 컸지? 왜 언니가 되고 싶지? 언니 돼서 뭐 하려고?
계속 아기로 지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언니노릇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단다.
그냥 원없이 낙엽더미를 실컷 같이 밟아보자.
그냥 이번 가을엔 언니 되지 말고 낙엽 밟고 노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