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에 대한 바른 생각
2년 전 나는 정년퇴직을 했다. 그리고 2년째 계약직으로 출근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정직원일 때나 계약직일 때나 근로조건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두 아들도 모두 장성했기에 교육비에서 자유롭다. 그런데도 아내는 돈을 벌어야겠다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도 만나고, 경조사도 많고, 여행도 다니고 싶은데 생활비에서 쓰려고 하니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십수 년째 하던 과외수업의 학생이 줄었다. 늘 '선생님'이라 불리던 아내는 집 근처 식당의 보조직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루에 4-5시간 일한다. 식당 개점 전 반찬을 준비하는 일이며, 바쁠 때는 홀 서빙도 한다. 나이 50 중반에 처음 시작한 식당 일이라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사장님과 함께 일하는 종업원들이 좋은 분들이라 염려했던 것보다는 즐겁게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아내가 식당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힘들지 않겠냐고 걱정했다. 일주일에 3일 이상 서울역 근처 '아침애만나'라는 무료급식소의 식당 봉사를 하고 있는데 끝나자마자 또 식당에서 일한다는 것이 육체적으로 무리가 가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일단 해 보고 정말 힘들면 그때 그만두겠다고 했다. 아내가 자신의 사회 활동과 고향에 계신 장인어른을 섬기는데 필요한 것은 스스로 벌어서 해결하고 싶다는 그 생각을 잘 알기에 크게 말리지는 못했다.
아내가 지인들과 커피숍에서 교제하는 시간이었다. 요즘 아내가 바쁘다고 소문이 났나 보다.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분이 물었다. "요즘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쁘세요?" 함께 있던 지인이 말했다. "부엌데기 아르바이트까지 시작했다네요." 아내는 순간적으로 생경한 '부엌데기'란 단어에 당황했다고 했다. 이 단어는 연세 드신 분들이 과거에 부엌일을 하는 여자들을 낮춰서 부르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나에게 ‘노동의 존엄’이라는 오래된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사회는 여전히 직업의 서열로 인간의 가치를 가늠한다. 화이트칼라 노동은 고상하게, 육체노동은 비천하게 여기는 시선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노동 자체이며, 노동이 단순히 생계유지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이라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철학의 주제였다.
한 인간이 노동함으로써 세상에 참여하고, 자신이 사회의 일부임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일은 단순한 경제 활동이 아니라 존재의 철학이다. 칼 마르크스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세계를 변형하고, 그와 동시에 자신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노동은 인간의 자유의 표현이며, 그 자유의 결과물로 만들어지는 세계는 인간의 삶 자체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노동에는 귀천이 있을 수 없다. 노동의 형태가 다를 뿐, 인간의 존엄은 동일하다.
성경의 ‘달란트 비유’ 또한 같은 맥락이다. 주인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고, 그 결실을 평가했다.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나 두 달란트를 남긴 자 모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았다. 주인은 수익의 총량이 아니라 성실의 열매를 보았다.
가치의 본질은 수치가 아니라 의미에 있다. 일이란 남이 보는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는 성취의 영역이다. 우리는 일이 주는 보상보다 그 일을 통해 얼마나 삶을 충만하게 느끼는가를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좋은 노동은 더 좋은 삶을 낳는다”는 말처럼, 노동은 인간의 자아를 유지시키는 근본 토대이다.
아내의 식당일은 누군가의 시선에는 단순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은 누군가의 식탁을 채우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온기를 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식당일은 단순히 ‘부엌일’이 아니라, 타자의 생명을 돌보는 노동이다. 그 속에는 책임이 있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
우리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을 그저 도덕적 구호가 아니라 사회적 진리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사회는 평등의 토대 위에 설 수 있다. 아내의 일상은 그 사실을 가장 단단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부엌일 봉사는 귀한 일이고, 부엌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은 천한 일일까?
직업을 대하는 가치관은 표현되는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말이 어떤 이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냥 웃고 넘긴 '부엌데기'란 그 말이 어떤 이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골로새서 3: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