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1989년 3월 어느 날,
개나리와 진달래의 꽃향기가 캠퍼스에 가득하고 따뜻한 봄 햇살이 기분 좋은 오후였다. 마침 수업이 없는 시간이라 동아리 방에서 잠시 쉬었다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복도로 나갔다. 그때 처음 보는 여학생이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 동아리 방을 찾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4학년 선배로서 직접 찾아온 학생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가입하려고..."
"참 잘 오셨습니다.
저는 회계학과 4학년 K순장입니다.
이곳으로 일단 들어오세요."
"학번이? 올해 신입생이죠?"
"네."
"무슨 과세요?"
"국문학과요."
"여기 가입 신청서를 먼저 작성해 주세요."
.....
"J자매님이군요.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줘요."
이것이 J와의 첫 만남이었다.
J가 스스로 찾아온 동아리는 한국대학생선교회라는 기독교 동아리였다. 나는 당시 4학년 졸업반이었고 수업 외 대부분은 동아리 활동으로 보냈다. 자연스럽게 J를 포함한 후배들과 많이 친해졌고 신앙적인 것뿐 아니라 개인적인 상담까지 하는 등 후배들의 멘토 역할도 했다.
그 해 가을이었다. 밤공기가 꽤 추웠던 것으로 기억되는 날이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J가 저녁에 L목사님의 부흥회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장소는 학교에서 꽤 먼 실내체육관이었다. L목사님은 기독교계에서 이단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J자매, 그 목사님 집회는 가능하면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그래도 꼭 가고 싶다면 제가 같이 가도 되겠어요?"
"한 번은 참석하고 싶어요.
순장님이 같이 가면 저야 좋지요."
우리는 실내체육관의 2층 관중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많은 분들이 체육관을 가득 매웠다. 체육관에는 신나는 찬양으로 울려 퍼졌다. 청중들은 L목사님의 말씀마다 '아멘'으로 화답했다. 나는 목사님의 말씀 중에서 성경과 다른 내용의 설교를 하지는 않는지,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는지, 관찰자 입장에서 꼼꼼히 따져가며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L목사님이 말했다.
"옆에 있는 분과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했던 것처럼...”
나는 같이 간 J의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장애가 있으면 생각과 감정도 장애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10대면 10대의 감정, 20대면 20대의 감정을 동일하게 느끼며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다. 다만, 대부분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나 역시 남중, 남고 출신이라 대학에 와서 이성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겠는가? 그러나 감정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남자로 인정받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학업과 기독교 동아리 활동에만 전념을 다했다. 나의 장애가 오히려 형제, 자매들과 부담 없이 지내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특히 많은 자매들은 개인적인 고민까지 나를 찾아와서 상담했다.
대학시절 4년 동안 후배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자매들을 이성으로 대하지 않았다. 자매들 역시 나를 이성으로 대하지 않았다. 방학 때로 기억된다. K자매가 개인적으로 기도하러 기도원에 가는데 혼자 가는 것이 걱정되니까 같이 가자고 했다. 특별한 일이 없었기에 나는 기꺼이 2박 3일 동안 동행했다. 나 아닌 다른 형제였어도 가능했을까? 주위의 이목 때문에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그 시절에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