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내와 단 둘이 KTX를 타고 고향을 다녀왔다. 홀로 계신 장인어른의 생신을 축하해 드리기 위해서였다. 단둘이 여행을 하면 아내는 무거운 가방에 나의 짐까지 챙겨 넣고 한쪽 어깨에 메고, 다른 어깨에는 나의 의료용 산소기까지 멘다. 그리고 장바구니 가방에는 또 다른 짐을 넣어서 든다 아내의 짐이 너무 많아 산소기는 내가 메겠다고 해도 아내는 내가 힘들까 봐 양보하지 않는다.
아내는 KTX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모 여행작가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산티아고 순례길 관련 영상을 몰입해서 보았다. 채널 운영자가 올린 여행 준비물까지 꼼꼼하게 챙겨 보는 것을 보니 너무나 가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COPD 판정을 받기 전에는 국내 여행은 물론 몇 차례 해외여행도 다녔다. 신혼여행으로 유럽, 가족여행으로 미국, 푸껫을 다녀왔다. 아내는 관광회사 TC로 일할 때 성지순례를 다녀오기도 했고, 나는 회사 일로 중국, 일본, 홍콩 등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
그런데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실려가고 호흡기 장애인이 된 후부터는 여행은커녕 회사 외근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아내는 어린 나이에 나를 만나 교제를 시작했고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아내 부모님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굽히지 않고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우리는 가정을 이루었다. 나와 아내는 모두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열심히 살았다. 하나님께서 듬직한 두 아들도 선물로 주셨다. 아내는 자녀를 키우느라 주위를 살펴볼 겨를 조차 없었다. 넉넉하지 못한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멋지게 해냈다.
이제 아들은 장성하여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이제 아내의 곁에는 남편만 남을 것이다. 시간적 여유도 있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해도 가끔은 폼나게 쓸 수도 있게 되었다. 남편이 정년퇴직하면 크루즈 여행도 다니고,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어보고, 가까운 일본에 가서 온천도 즐겨 보고, 미국의 형님 집도 방문해서 여행도 하려고 했는데 아내의 곁에 있는 남편은 COPD 판정을 받아 의료용 산소기와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중증 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이제 남편은 일본 여행은 커녕 국내 여행조차 힘들어한다. 언제 응급실에 실려 갈지 모르는 불안한 남편 곁에서 '맘 졸이며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지는 않을까?' 아내는 불안하다. 키는 작아도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숨 쉬기 조차 힘들어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나의 남은 인생은 왜 이럴까?' 아내가 이런 고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려운 장애 속에서도 열심히 살았고, 가족을 위해서 헌신한 아버지 이자 남편인 것을 잘 알기에 남편에 대해서 원망조차 속 시원하게 할 수 없는 아내의 심정은 어떨까? 나이가 들어 남편과 함께 해 보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하게 되어 속상해하는 이 마음을 '사치'라고 누가 욕할 수 있을까? 평생 장애인 남편과 29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주위로부터 받은 다양한 시선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은 당사자가 아니면 곁에서 지켜본 남편조차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지나 온 세월과 자신이 선택한 일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가끔, 진짜 가끔은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실 때 말을 들었더라면...'
후회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지금의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끔씩 밀려드는 파도 같은 생각이 마음을 힘들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내가 원하는 것이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남편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다. 아내의 29년이 그러한 것을 당당히 요구할 자격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남편이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남편은 29년 전 아내의 부모님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을 다시 느끼게 되고 부모님 앞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아내에게 "미안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